渦中日記 2015/3/14

며칠을 오에선생관련 일로 보냈다. 나로선,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을 잠시 잊고 싶었던 며칠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문학이 정치나 역사와 무관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우리의 하루하루가 정치(사회구조)와 무관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오에 선생 역시, 개인의 내면이 어떻게 사회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고, 때로 억압받게 되는지를 일관되게 써 왔다.
그리고 내게 오에선생의 작품은 초기의, 수재작가다운 명료하면서 건조한 작품들보다, 작가자신이 말하는 후기작품들을 통해 다가왔는데, <인생의 친척>,혹은 <새로운 사람아,눈을 떠라>등에서 받았던,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오래도록 선생의 작품을 읽게 만든 힘이기도 했다.

<인생의 친척>에서 선생은, 지적/신체적 장애아였던 두 아들이 자살한 후,슬픔과 절망을 견뎌내고 아름다운 종말을 맞이하는 한 여성을 그려내면서 “슬픔”을 “친척”같은 것이라 표현한다.
실제로 장애가 있는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인생이란 일반인들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것일 터이고, 설사 순간순간의 기쁨이 있다 해도, 그 기조가 가라앉은 슬픔일 것만은 분명한 일이다. 물론 나쁜 일이라는 의미에서의 슬픔이 아니라, 어떤 부조리와 불균형과 파괴의 의미를 매일처럼 “생각해야 하는” 슬픔.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선생의 자택에 초청받아 간 적이 있다. 나는 그 때 아들 히카리(光. 빛)씨에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존 엘리엇 가디너가 연주한 바흐 마태수난곡을 선물했다. 2012년 봄의 일이다. 오에 선생님께도 그 전에 에스페리온 20이 연주한, 역시 바흐의 the art of fugue 를 선물한 적이 있다.
근처 프랑스식당으로 식사하러 나갈 때, 선생은 현관에서 몸을 굽혀 아들이 신발을 잘 신을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그 때 나는 선생의 슬픔을, 목도했다고 느꼈다. 그건 단지 어떤 불편함도 아니고 번거로움도 아니고 그렇다고 도움이나 시혜가 동반하기 쉬운 어떤 감정도 아니고, 그저 인생의 무게, 같은 것이었다. 삶에 대해 경건해질 수 있고 인생에 겸허해 질 수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그러나 자주 잊어버려 인생을 한없이 가볍게 만드는.

사진은 2008년 1월. 아사히신문사에서 주는 오사라기지로논단상시상식에 오에선생도 와 주셨었다. 함께 찍은 이는 아사히신먼사 와카미야 주필. 작년에 내가 일본우익을 대변한다는 기사에 항의해 “나도 우익의 대변자라 부르라”는 칼럼을 동아일보에 썼던 이다. 그는 일본수상 야스쿠니참배를 반대하고 독도를 한국에 양보하라고 써서 일본우익들의 맹렬한 반발을 샀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그저 그가 “위안부강제연행에 대한 아사히의 과거기사가 군인의 말만 믿고 좀 많이 나갔다”고 말했다는 것만으로 아사히가 우경화했고 와카미야씨는 보수,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같은 편이 합리적이려고 하는 순간, 그들은 늘 윤리를 독점하려 한다.

실은 오에선생과 함께 보냈던 시공간에서조차 나에 대한 적의를 가진 이가 나타났었다. 그리고 오에선생과 나를 이간질하려 했다. 심지어 내게 오에선생초청을 의뢰했던 김대중도서관측 사람들과도. 그래서 사실은 여전히 편치만은 않았던 며칠이었다.

곳곳이 적의의 지뢰밭,이라고 느낀다. 이 한 달, 여러사람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견뎌왔지만, 다시 “인생의 친척”을 읽든지..해야 할 것 같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78948798798700&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5/2/28

결국 2월 마지막날은 나를 고발에 이르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언론사에 대한 실낱같은 기대가 깨지는 날이 되었다. 한겨레에 오늘 기사를 실은 길윤형기자에게 질문을 받고 대답했던 내용을 다시 올려둔다.

나는 이 대화에서 분명히 와다교수와도 의견이 같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런데도 같은 것으로 “추정”한다면서, 심지어 결국은 “일본우익의 주장을 수용”한다고 써 버렸다. 더구나 나는 한국이 요구하는 “법적”책임을 지우는 일이 왜 어려운지를 말했을 뿐인데 “책임”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뉴앙스의 기사가 되고 있다.

나는 분명히 일본의 책임을 물었고, 앞서 올린 와다교수의 말처럼, 일본에서 내 책을 높이 평가한 사람들은 우익이 아니라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 애써 왔던 사람들이다. 아사히신문이나 마이니치등 진보언론이 여러번 관심을 표했고, 우익/보수 성향의 산케이나 요미우리에겐 아직 무시당하고 있다. 그런 상황을 가장 잘 알 “일본특파원”이 그걸 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전한 것이 다름아닌 한겨레 신문이다.

나는 우익도 아니고 협력자로서의 친일파도 아니다. 아무나 “우익””친일파”딱지를 붙이는 일로 자신들의 목소리와 자리를 유지하려는 이들이 정치적으로는 나와 먼 곳에 있는 이들이 아니어서 그동안은 본격적으로 싸우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런 유보적 자세를 접으려 한다.

나의 목표는 일본우파까지 주목해 주는 것이다. 보수언론이 움직여야 아베정권도 움직일 수 있을 것이기에. 진보의 생각만으로 좌우가 공존하는 “일본공동체”를 움직일 수는 없다. 내가 90년대에 일본이 만든 아시아여성국민기금을 평가한 건, 그것이 불완전하나마 좌우합작형태의 “사죄와 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문제는 끝난 문제라고 일축했던 일본의 보수세력을 내 책이 혹 움직이는 일이 있게 되면, 오로지 자신들과 해결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비난해 온 이들은, 내 논지가 그들을 움직였다고 인정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말하고 싶은 내용을 내가 말했다고, 나는 일본우익의 나팔수였다고, 또다시 앵무새처럼 말할 것이다.

나를 할머니의 이름으로 고발하도록 만든 것은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국가를 동원해” 억누르려 한 한국지원단체다. 그리고 그들의 그런 행위를 뒷받침한 건, 일부 재일교포이고, 내 책이 일본우익의 상찬을 받았다는 거짓말을 쓴 한겨레신문이고, 고발이후에도 좌시했고 가처분판결이 나자 그 판결을 옹호했던 몇몇 지식인들이다. 학문을 국가의 힘을 빌어 단죄하는 일에 지식인마저 동참한 것이 2015년의 한국사회다.
한국사회의 위기와, 이들은 무관하지 않다.
할머니들을 죽이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그들이다. 오로지 자신들의 생각을 관철하기 위해서.

온갖 “해석”들이 나를 죽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이데올로기와 편견을 넘어 나의 문제제기를 왜곡과 곡해 없이 읽어 준 건 소수의 “열린” 사람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건 “강한”사람들이었다.
그런 이들, 열려있고 강한 또다른 이들이 책을 만날 수 있도록, 책을 역시 출판해야 할 것 같다.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68639513162962

渦中日記 2/25

한 언론의 기자가 기사를 쓰겠다면서 질문을 했다. 일본특파원이라 일본사정에 대해서도 위안부문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정치가나 일반인들과는 질문의 차원이 달라 성의껏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내가 위안부문제해결과 한일화해를 위해 쓴 건지 혹은 일본에 “법적책임이 없다”는 걸 주장하고 싶었던건지 알고 싶어했다. 나로서는 서글퍼지는 대답이었지만 말했다.
“결론부터 정하고 덤비지는 않습니다. 그럴 이유도 없고요. ”
한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뭔가 다른 의도를 담아 글을 쓰는 식으로 머리굴리는 부류의 사람을 싫어하고, 누군가의 지시에 쉽게 따를만큼 순종적이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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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논리적으로 정합적이지 않다. “보상”의 의미는?

이 책은 여러 “다른”오디엔스(독자/청중)를 대상으로 한 책이에요. 책에도 썼지만 원래는 일본을 향한 글만 쓰여질 예정이었구요. 일본이라 해도 지원자/정부/부정자,이렇게 세 부류입니다.
앞에서 하던 얘기와 뒤에서 한 얘기가 다르다,고 느껴지는 건 그 결과입니다. 예를 들면 한일협정에 관해서도 한국을 향해선 “한국정부가 개인의 청구권을 없애 버렸으니 그걸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했으면서 일본을 향해선 “당신들은 보상 끝났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쟁관련 보상이었고 식민지배에 따른 억압과 고통에 대해선 보상한 적이 없다”고 말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모순으로 느껴질 수 있고 어느쪽이 진짜냐! 라고 묻고 싶어지겠지만 이런 식의 논리전개가 된 건 결국 대립하는 문제의 해결방법은 각자 자신의 문제를 보는, 자기비판적인 시각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커다란 틀에서 누가 잘못했는지에 대해선 명확히 썼습니다. 일본의 지배가 문제이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정대협등 지원단체는 보상과 배상의 의미를 구별해서 쓰고 있어요. 위안부문제는 “법을 어긴 국가범죄이니 입법을 해서 배상하라”라는 의미에서 “배상”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학자들이 말하는 건
더이상 “강제연행”이 아닙니다. 오히려 식민지에선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저에 대한 고발장에서조차 쓰고 있더군요.
“약취,사기”로 업자들이 데려 왔다 해도 알고도 받아들였으면 범죄이고 일본군이 알고도 받아들였을 거라고 말하고 있는데 실은 알게 된 경우 업자에게 다른 곳에 취직하게 하도록 시키거나 돌려보낸 경우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이전에 계약서를 확인해 업자의 사기나 납치를 방지하려 했구요. 그러니 전부가 그렇게 하지 않았을 수 있지만,일본의 공식방침은 위의 주장과는 다르다고 해야 하구요. 알면서 묵인한 경우도 없지 않았겠지만 그 경우 업자가 이미 돈을 주고 사 왔다던가 하는, 일본군으로서도 관리영역 바깥의 경우였으리라 생각합니다. 전 그래서 수요를 만든 자체–전쟁을 일으키고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식민지로 만든 지역의 사람들까지 전쟁터에 동원한 책임, (의도여부를 떠나) 묵인한 책임을 물은 겁니다. 위안소를 공식적으로 만든건 근대일본이 시스템화에 능숙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요. 그리고 모두 획일적인 위안소가 아니었다는 것도 인식해야 하고요. 일본에서 강연할 때 유곽에 있었던 사람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기에, 유곽을 군대용 위안소로 지정한 곳도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동시에, 지정업소가 아닌 곳에 있었던 사람(여기에도 비지정이지만 인가업소-유곽의 위생시설등 체크했던 업소와 인가조차 못받았던 이른바 사창도 있었다는 걸 “우리는”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대화의 접점을 찾기 위해서는 가장 강력한 피해에 주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와 다른 부분을 소거시키고 싶은 욕망에 이기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전 그걸 지적했던 거구요.
“보상”이라는 단어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한국어판을 쓸 땐 기금과는 달리 “정부국고금”으로, 기금을 받지 못한 분들께 추가 보상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었고 그런 의미입니다. 국회를 거치지 않는 정부보상금이지요. 다만, 이후 국회결의를 하는 게 가장 좋겠다고 생각했고, 일본어판에선 그렇게 썼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다시 기회되면 말씀드리지요.

2. 와다교수의 의견(국고금으로 보상금지급)과 같나?

한국어판 내고 나서 다른 자료들을 보면서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와다선생님과 달리 국회결의를 주장하는 겁니다. 오히려 보상금을 어떻게 할 건지는 더 첨예하게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주장(국민동원의 한 형태다)이 받아들여진다면 입법이나 국고금 지급도 가능할지 모르지만 “강제동원을 했으니 배상하라”는 현재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또 일본한테 보상금을 대신 받은 한국정부가, 할머니들에게 4천만원 이상 지급했고 매달 이런저런 형태로 지원하고 있다는 것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겠지요. 할머니의 체험은 다 다른데 해결은 “하나의 방안”으로 정해야 하는 정치/국가 문제가 되었을 때 어떻게 할머니들의 다른 목소리에 각각 귀를 기울이면서도 합리적으로 판단할 것인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3. 현실적 타협론인가?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기본적으로는 아닙니다. 합리적이고 옳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명분에 무게가 실려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백년이 걸리더라도” 라는 말로 주장을 관철하는 건 첫째 당사자를 무시(얼마전에 만난 할머니는 사죄조차 요구하지 않고 보상만 해 주면 된다고 해서 오히려 제가 당혹스러울 정도였습니다. )하는 일이고, 할머니의 의견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도 인식될 필요가 있습니다. 들리지않을 뿐이지요. 부산정대협회장님을 만나 보세요. 지방에 계셔서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 문제 해결에 사비털어가며 20년이상 애써 오신 분인데 그분 말씀이 “나도 내 돈 내가며 신문광고를 통해 기금을 반대했다 .하지만 할머니들 돌아가시는 거 보면서 받게 할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우리 여성지도자들(이 분은 이화전문여고출신의 할머님)이 못 받게 했다”고 하시더군요.

4. 제가 받는 인신공격적 비난이 안타깝다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 문제가 해결되려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한 심층취재와 인터뷰가 필요합니다. 외부의 비난과 우려 속에 있는 현재 한국사회의 문제를 외부가 아니라 우리스스로 들여다보고 아프더라도 직시하는 일로 치유해나가기 위해서도요. 저는 제 사태를, 2009년의 서경식교수의 한겨레 칼럼이후에 저에 대한 오해가 확산되면서 5년후에 지원단체에 의한,아마도 쌍방이 의식못할 “대리고발”을 당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오해의 종류도 다양하고 지식의 폭도 달라서 더 어려운데, 정치나 개인적인 이익에 이용하는 사람들, 단순오해로 비난하는 이들에게 동조하는 지식인들의 행태가 가장 한탄스럽군요. 저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을 위해서.
언론에 대해서도 깊이 실망해 왔지만 그래도 제대로 보려하는 분들이 계신 걸 잘 압니다. 기대를 놓지 않겠습니다. 건필하시길 빕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70165993010314

渦中日記 2015/1/13

멀리 사는 페친이 아름다운 찻잔을 보내 주었다. 황금빛찻잔. 바깥이 아니라 안쪽이 황금빛이어서 마음에 든다. 귀모양으로 살짝 구부러져 있는 건, “차를 마실 때 귀기울이는 순간을 떠올리며”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페친이 늘어나다 보니 진득하게 “귀기울이는 순간”이 적어진다. 읽었다는 표시로(공감했다는 표시조차)”좋아요”를 누르지만 가볍고 가벼운 소통에 회의가 든다. 아무래도 페친을 좀 정리해야 할 것 같다.

어제 대통령기자회견은 다 들어 볼 생각이었는데 그만 십분을 못 넘기고 꺼 버렸다. 대통령에게 부족한 건 말하는 기술이 아니라 “귀기울이는” 자세였다. 소통은 귀기울여, 정성껏 듣는 일에서 가능해진다. 대통령은 会見을 했지만 누구도 만나지 않았고 보지 않았다.

대통령 뿐 아니라, 나와 다른 이의 말(생각)은 듣지 않고 배제하려는 욕망이 진영과 상관없이 넘쳐난다. 그래서 내겐 경제적 양극화 이상으로 심리적 양분화문제가 심각해 보인다. 프랑스테러사건이 남의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 것도 그 때문이다. 갈등관련 뉴스를 볼 때마다 소리없는 총성을 매일밤 듣는 기분. 대체적으로 따뜻하고 지적이지만, 페북에도 조롱과 냉소와 욕설이 넘친다.

어제 나는 책의 초고를 보여주기까지 했던 가까운 지인에게 아주 약간 비판을 받고, 배신감에 잠시 분노했었다. 그리고 곧바로, 그건 내가, 책에 대한 모든 비판이 현시점에서는 고발을 지지하는 일이 된다는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물론 고발취지가 이제 “논지”를 문제시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그건 틀린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건, 내가 문제시해 왔던 “강자로서의 피해자”가 된 순간이기도 했다. 피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어떤 비판도 들으려 하지 않는 자세. 피해자의 오만.

어쩌면 우리의 대통령의 “불통”도 거기서 온 건지도 모르겠다. 압도적 폭력을 만났던 트라우마가 만든 도덕적 우위.

아무튼 분열과 혐오가 넘치는 사회를 차세대에게까지 물려줄 수는 없으니 “귀기울이는” 일을 좀 더 해야 할 것 같다. 깊고 고요한 밤과 마주하는 것처럼. 우주처럼 이해불가한 안팎의 타자들에게.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40619592631621

渦中日記 2015/1/10

페북에 <받은 메시지함>외에 <기타메시지>함도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고발사태 직후에 받은 메시지들을 반년이 넘도록 모르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제서야, 반년이나 늦은 답장들을 보냈다.
그런데 이 메시지를 주신 분은 이미 계정이 없었다. 너무 죄송한 마음. 혹 이 분이 누구인지 짐작이 가고 연락이 닿는 분이 계시다면 알려 주시면 좋겠다.
당시 받은 메시지들을 뒤늦게 읽으면서 약간 가슴이 싸아했다.
이제 곧 7개월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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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저는 미국에 30년을 거주하고 있는 ……라고 합니다. 메시지를 보내고자 마음 먹은 이유는, 한국인의 일반적 “정서”에 반하는 이슈에 대해 방대한 자료를 정리하여 책을 저술하신 교수님의 노고와 용기에 감사드리고, 현재 교수님께 가해지는 수많은 비판과 질타에 굴하지 마십사고 응원하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는 제가 살았던 Pasadena 에서 20여분 거리의 글렌데일에 위안부 동상을 세운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부터 였습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에 왜 애정이 없겠으며, 일본의 침략에 왜 분노하지 않겠습니까마는, 글렌데일이 자매도시들을 소개하기 위해 할애한 공원에 한국이 제일 먼저 위안부 소녀동상을 세웠다는 사실은 시의 취지와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저는 동상건립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고, 그러다 보니 이 문제에 대해 여러 자료들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중 제가 가졌던 가장 큰 의문점은 위안부가 차출되었던 다른 나라들은 조용한데, 왜 유독 한국만 이렇게 난리를 치는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러다 약 한달 전 웹에서 <제국의 위안부>의 발췌부분들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곤 비로서 많은 부분들이 이해되었습니다. 특히나, 책은 위안부 이슈가 어떤 과정을 거쳐 전개되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를 사신 저의 어머님이 말씀하셨던 부분들과도 일치했습니다.

현재 교수님께 비판을 가하는 많은 지식인들은, 교수님이 들춰내신 팩트가 불편한 듯 합니다. 팩트의 일부만 조명했다는 사람들은, 이전에는 알려진 팩트가 거의 없었고 감정만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고, 일부 사람들은 “강제 vs. 자발” 이란 이슈가 칼로 무우쪽 자르듯이 쉽게 단정지을 수 없는 상황임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강제라고만 억지부리며 “매춘”의 측면에는 한점의 고려없이 무조건 비방만하고 나서는 듯합니다. 뿐만 아니라 교수님이 책에서 기술하신 한국측 실수/조작/통제 등은 아예 무시합니다.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이 이런 편파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감정이 지배하는 사회, 특히나 그 감정이 적개감일 때, 사실에 근거하고 이성에 입각하여, 이에 반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라 봅니다. 교수님의 저서가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는 만드셨지만,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의 의문을 해소해 주셨다는 점을 어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앞으로 다가오는 어려움들을, 책을 저술하셨을 때 가지셨던 동일한 용기로 지혜롭게 극복해 나가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어눌한 한국말로 두서없는 글을 쓰서 죄송합니다만, 소리없이 교수님을 응원하고, 저서에 공감하는 사람도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2014/6/21)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38835126143401

渦中日記 2015/1/5-2

일본어판을 만든 편집자가 보내준 어제날짜 마이니치신문사설을 보면 일본인들이 내가 던진 공을 받아 주었다고 느낀다.
이런 자료들을 법원에 제출하면 다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한들, 원고측은 일본인들이 내 책에 호응하는 건 내가 일본의 나팔수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겠지. 재판이란 서로 소설을 쓰는 거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이 생각나는 우울한 저녁.
———————-
(전략)
70년 담화에 필요한 것은,전후 50년 때 발표된 무라야마담화를 전후일본의 흔들림없는 기반으로 삼고,그에 입각해 미래를 전망하는 자세일 것이다. 무라야마 담화는 <과거의 한 시기에 국가정책을 잘못 정하여><식민지지배와 침략으로><아시아국가들에 커다란 손해와 고통을 끼쳤다>라는 인식이 핵심이다 .
(중략)
일본에서는 아사히신문의 오보를 계기로 위안부문제 제기자체를 부당하다고 하는 논조가 생겨나고 있다. 사실관계를 수정하는 건 필수적이지만, 위안부를 필요로 했던 사회의 추악함은 어떤 반론으로도 변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의 박유하 세종대 교수는, 최근저서<제국의 위안부>에서,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설을 비판하면서 <전쟁에 동원된 모든 이들의 비극 안에 위안부의 비참을 위치시켜야 성까지도 동원하는 “국가”의 기괴함이 드러나게 된다>고 쓰고 있다.
(중략)
이제 역사를 배타적인 민족주의로부터 차단할 때다. 타자에 대한 상상력을 가져야만 그 주장은 받아들여진다. 일본의 정치지도자는 편협한 자기중심역사에 갇혀서는 안된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33801089980138&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4/12/15

일본에 가기 전에도, 가서도, 그리고 다녀온 이후에도, <재판자료>라는 걸 여전히 붙들고 있다. 이제 익숙해져서 쓰여 있는 말들을 분노와 답답함보다는 이해로 대할 수 있게 조차 되었지만, 무의미한 심적/신체적 노동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가중중. 그렇게 반년이 지났다.

일본에서 만난 아들이, “명예훼손”재판을 방청하고 왔다면서 그랬다. “엄마도 명예훼손을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가 필요한 거 아니야?”라고.

아니,아들아. 엄마한텐 지금 “인권”변호사가 필요해.. 이런 일에 시달리느라 잃어버린 시간들을 되찾아 줄. 책이나 음악이나 사람이나 풍경에 오롯이 빠질 수도 있었던, 인생의 한 때를.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17978541562393&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4/12/7

하루종일, 곡해와 오해, 심지어 하지 않은 말까지 했다고 주장하는 글들과 마주하다 보니 피로가 극에 달하고 있는 중이다.
자신이 쓴 논문이나 책에 의문을 가진 이가 있다면 대답을 해야 한다. 하지만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하거나,독해 자체에 문제가 있는 질문에 대답하는 일은 심신을 지치게 한다. 심지어 공적인 장이 아니라 수사관이나 재판정에 내기 위한 것이라면. 더구나 다른 할 일도 기다리고 있는 일요일을 그런 작업에 온전히 바쳐야 하는 것이라면. 법의 힘으로 “의무”로 다가온 일이라면.

진 기억이 없는 3억의 채무를 요구하는 서류에 대답하면서,도로감에 심신이 갉아먹혀지는 느낌. 사죄하러 가지 않은 내게 그들이 원한 건 이런 것이었을까. 피로가 아니라 도로감때문에 손드는 일.
12월 첫 일요일. 우울한 오후에.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13002972059950&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4/11/30-2

조선닷컴에 관한 언론중재위원회의 결정은 고발당일과 다음날 이틀동안 쏟아냈던 9개의 보도를 삭제하고 반론보도를 낸다는 내용이었다. 7월에 올렸던 포스팅링크들를 다시 보니 이미 삭제되어 제목조차 확인할 수 없는데, 거의 같은 내용을 <제국의 위안부, 충격을 넘어 경악><박유하 교수,알고보니 와세다대학 출신>이라는 식으로 제목만 바꾸어 내보낸 기사들이었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기록을 위해서다. 조선일보와 조선닷컴은 같은 회사는 아니라지만, <조선>이라는 이름을 단 매체이니 이제 이름에 값하는 품격있는기사를 써 주었으면.

http://m.chosun.com/svc/articl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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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08520755841505

渦中日記 2014/11/27

어젯밤엔 오랫만에 잠을 설쳤다. 보고 싶지 않아 미루어 두었던 한달 전 영상을 봐 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끔, 나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이 사태가 정말 현실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어쩌면 내가 아직 버티고 있는 건, 그 현실성(적의)에 “제대로” 직면하지 않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제 세번째 재판이 있었고 가처분심리는 이제 끝났다.
원고측은 6월16일 첫고발장에서 “박유하의 책은 거짓말투성이”라는 식으로 말했었다. 7월과 9월초에 답변서를 제출했더니, 9월중순으로 예정되어 있었던 심리를 일방적으로 연기했다.
한달후,10월21일에는 고발취지를 바꾸는 신청을 하면서, “박유하의 책은 거짓말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논지가 자신들이 생각해 온 것과 다르다. 그렇게 쓴 박유하의 인식은 한국사회가 추구해온 정의에 반한다”고 했다. 웃지 못할 일은 센댈의 <정의론>까지 인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11월 24일, 다시 추가된 세번째 문서에선 이렇게 썼다. “박유하의 생각에 대해 말하는 건 조심스러우나 해결을 위한 방식이 우리와 다르다. 그래서 그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이 5개월동안, 그들은 이렇게 말을 바꿔왔다. 싸움을 걸었으니 이겨야 할테고, 그러기 위해 말을 바꾸는 건 사실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 최소한 그들이 잘못 알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한번쯤은 언급해야 하는 거 아닐까. 남의 책을 함부로 훼손한 데 대한 잘못정도는 언급하는 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 아닐까. 책을 왜곡요약해 전국민의 비난이 몰리도록 만든데 대한 사과쯤은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싸움을 하더라도 지켜야 할 룰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내가 이 재판에 대한 절망적인 기분이 드는 건 이런 부분이다. 그들의 생각과 맞지 않으니 허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 같은 건 오히려 웃어넘길 수 있다. 말하자면, 오류는 용서할 수 있지만, 비겁한 건 견디기 힘들다.

담당변호사들과 고발장작성을 도왔을 연구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이 원하는 건 무언가? 정말로 “할머니의 명예”인가? 지원단체나 기존 연구의 명예인가? 자신들의 “생각”자체인가? 유일선”으로 생각한 그걸 지키기 위해서는 타인의 명예를 짓밟아도 되는가? 당신들이 말하는 “정의”란 그런 것인가?

제국의 위안부 소송 2차심리 나눔의집 기자회견 / 박선아

http://youtu.be/wfqeQ0qXGJo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06078016085779

渦中日記 10/3

멀리서 페친 정나란님이 오신 걸 계기로 야심차게 만남의 기획을 했는데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줄 “가을햇살”과 청명한 하늘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다 어제부터 컨디션이 좀 이상하더니 감기기운. 따끔거리는 목과 묵지근한 근육통을 핑계로 머리맡에 책 몇권을 쌓아두고 게으름을 피울 특권을 누리고 있다.(하여 어제 올린 포스팅은 혼자보기로 돌려 두었다. 술을 마시긴 글렀고 오랜시간 앉아있는 것도 무리일 것 같아, 정나란님과 호젓하고도 조용한 대화의 시간을 가질 예정. 개별적으로 연락 드렸지만 참석해 주시겠다 한 분들과는 다음 기회에 만나기로 했다.)

페친들이 언급하기에 봐 봤던 한 드라마가 정신(마음)을 앓는 사람들을 다룬 건 소재만으로도 탁월해 보였다. 사실 마음의 병을 앓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우울증”이니 “스트레스”니 하는 단어들이 생기면서 관리가능한 정도의 마음의 병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사회 속을 활보하지만, 실은 누구나에게나 그 활보가 버거운 순간은 있기 마련이다. 스스로가 관리할지 타인에게 관리를 부탁할지의 차이일 뿐.
“일”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거나, 필요한 이야기가 아니라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이야기나 대상으로 도피하는 건, 아마도 그런 “자기관리”의 시간들일 것이다.

어제는 반론을 쓰기 위해 이재승교수의 비판을 다시 읽었는데 비판자체보다 비판에 담긴 적의와 마주하는 일이 또다시 나를 우울하게 했다.
나의 싸움은 재판이나 폭력과의 싸움이 아니라, 오에겐자브로의 소설에서처럼 슬픔이 내 얼굴에 곰보자국을 남기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수많은 적의들이 나를 망치지 않도록 보호하는 일. 분노도 경멸도 오만도 아닌, 다른 자세로 마주하는 일. 적의의 바다에서 헤엄쳐 나오는 일. 그럴 수 있도록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일. 경험의 흔적을 다른 형태로 남기는 일.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웠다는 날. 나라보다 먼저, 자신을 꼿꼿하게 세우는 일들이 도처에 필요해 보인다. 오늘저녁엔, 미움과 폭력과 적의에 의해 ‘찌그러진’영혼들을 위해 건배해야겠다. 의심과 증오와 욕망에 의해 일그러진 영혼들을 위해서도 무언가 해야겠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68931486467099

渦中日記 8/7

소장에 있었던 <문제>시 된 부분에 대한 반론을 쓰는 중. 한번 공개된 글은 특별한 경우 아니고는 거의 다시 안 보는 편인데 이 책은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이 여름,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더웠던 여름으로 기억될 것 같다.

民事裁判用の資料を作っている。100箇所以上の「問題」とされたところにすべて、いちいち反駁しなければならない。人生で、もっとも暑かったと記憶されることになるだろう夏の日々。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934231029937145&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8/7-2

오후에 모월간지와 인터뷰를 했다.의뢰가 왔을 때 주저한 이유가 두가지 있었지만,결국 수락한 이유는 기자가 고발사태 이후 나와 책에 대해 나온 언론보도에 왜곡이 많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기사내용은 물론 제목까지 확인하고 합의된 시점에서 내보내기로 약속.

만나보니 그의 문제의식이 진심인 것 같아 다소 안심했는데,그런 나에게 “기사가 나와봐야 안다”고 견제구를 날린 건 인터뷰에 동석해 주었던 젊은 친구들.
기자를 믿지 못한 건지 나를 믿지 못한 건지는 모르겠지만,한달 전부터 이들이 너무나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346224565646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