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 과거사 보도의 ‘자극 경쟁’과 ‘사실 경쟁’ (한국일보)

장정일 소설가

일본군이 만든 위안소의 조선인 위안부 숫자는 어떤 연구를 통해서도 아직 숫자가 확정된 바 없다.

그저 가해국(일본)은 숫자를 줄이려고 하고, 피해국(한국)은 숫자를 늘리려고 한다. 한국의 경우 위안부 문제 활동가들과 언론은 관행적으로 ‘20만’설을 채택한다. 2015년 12ㆍ28 합의 이후 신속하게 기획된 ‘시사IN’(제435호 2016.1.16.)의 군위안부 특집이 “일본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는 최소 8만명, 최대 20만명으로 추정된다”고 쓴 것이 대표적이며, ‘한겨레’ 1월 12일자에 나온 이윤제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칼럼도 “약 20만명의 한국 여성이 성노예가 되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관행적으로 쓰고 있는 20만 설은 앞으로 늘어나든 줄어들든, 활동가와 연구자가 사료와 논리로 뒷받침해야 할 숙제다. 그런데 사고(社告)나 마찬가지였던 ‘한겨레’ 6월 22일자 기사는 “2차 대전 당시 일본 정부는 30여만명으로 추산되는 식민지 조선의 어린 소녀들을 일본군 위안부로 끌고 가 성노예로 삼았다”라고 썼다. 20만에서 10만이 늘어난 30만 설을 주장하려면, 사료나 근거를 제시하면서 기존의 설을 논박해야 한다. 예컨대 ‘뉴욕타임스’가 600만명이라고 관행적으로 알려진 나치의 유대인 학살 숫자를 700만명으로 조정하고자 할 때는 그만큼의 설명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언론이라면 당연히 거쳐야 할 확인 절차를 ‘찌라시’는 괘의하지 않는다.

만주사변 이후 조선, 중국, 남양군도(남태평양제도)에 일본군 300만명이 있었다. 20만명 설이 맞는다면 일본군은 병사 15명당 1명의 조선인 군 위안부를 둔 게 된다. 그런데 공인된 중국 연구자들은 최소 20만명의 중국인 군 위안부가 있었고, 강간을 당한 중국 부녀자의 수는 그것보다 많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일본군은 타이완,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식민지와 점령지마다 현지인으로 이루어진 군 위안소를 추가한 데다, 그것도 모자라 강간을 일삼았다. 이 모든 게 사실이면, 일본은 원자폭탄 두 방에 나가떨어진 게 아니다. 전쟁을 해야 할 군인들이 불철주야 성폭행만 하느라 패망한 거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인 인구를 1,500만명으로 잡고 남녀 성비가 같았다고 상정할 때, 20만명이라는 군 위안부 숫자는 37.5명당 한 명의 여자가 끌려갔다는 뜻이다. 그런데 적어도 750만명의 여자 가운데 위안부로 삼기 힘든 10세 아래와 30세 이상의 여자를 빼고 나면 결혼 적령기의 여자 가운데 대부분이 일본군의 마수에 걸려든 게 된다. 민족의 가슴에 불을 지르기 위해 찌라시나 같은 언론이 ‘자극 경쟁’을 계속 벌인다면, 슬금슬금 10만명씩 늘어난 끝에 100만명의 조선인 군 위안부가 있었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불놀이가 신문을 한 부 더 팔게 해줄지는 몰라도 이런 국내용 선동으로는 결코 일본의 국가 범죄를 추달하지 못한다.

최근에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한 책 세 권이 나왔고, 어떤 책은 ‘한겨레’에 대서특필됐다. 이 기사는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 극우 ‘산케이신문’의 격찬을 받았다는데 새빨간 거짓말이다. 지은이가 기소되자 “한일 상호이해를 지향하는 책”이라고 쓴 것이 ‘산케이신문’이 보여준 가장 수위 높은 격찬(?)이었다. ‘한겨레’ 기사는 박유하의 책이 일본인으로 하여금 한국인 전체를“‘거짓말쟁이’ ‘사기 집단’으로 치부”하도록 만들었다고 말하는데, 행여 위안부 문제에서 한국인이 거짓말쟁이나 사기 집단이 되었다면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따로 있다.

위안부 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언론 사이의 자극 경쟁은 비용(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자극을 하면 할수록 ‘민족 정론지’라는 영예를 차지하게 된다. 반면, 가령 위안부의 수를 낮추는 것과 같은 ‘사실 경쟁’은 비용이 드는데다가 ‘반민족 언론’이라는 오명마저 각오해야만 한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과거사를 다루는 세계의 모든 언론은 이 딜레마에 빠져있다. 언론이 사실보도와 진실추구라는 준칙에 근거한 사실 경쟁을 외면하고 자극 경쟁에 뛰어들 때, 그 나라 국민은 거짓말쟁이나 사기 집단이 된다.

원문: [장정일 칼럼] 과거사 보도의 ‘자극 경쟁’과 ‘사실 경쟁’ (한국일보)

장정일, 그 소식에 나는 부끄러웠다 (시사IN)

장정일 소설가

한국과 일본은 군 위안부 숫자를 5만명에서 20만명까지 달리 추산한다. 여러 이유로 총체적 연구가 쉽지 않다. <제국의 위안부>는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려는 지은이의 강박 때문에 총체적 관점이 휘발되고 말았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대한해협이 아니라 군 위안부 문제가 놓여 있다. 실체를 발견하는 작업에서부터 해결 방안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는 경험의 소유권을 가진 피해 당사자가 엄연히 생존해 있기에 오히려 총체적 연구가 쉽지 않다. 이미 ‘일본군에 의한 조선 부녀자 강제 연행’이라는 단 한 줄로 군 위안부에 대한 상식이 완성된 터에, 그것과 다른 접근이나 그 어떤 보충도 친일파라는 지탄을 피하기 힘들다. 하지만 군 위안부의 복잡성은 아직 그 숫자마저 명확하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인은 ‘20만명’설을 선호하고, 일본 연구자는 5만~7만명으로 추산하며, 만주에 주둔했던 한 일본군 병사는 “사단 군인 2만명에 50명” 정도라고 증언한다.

만주사변 이후 조선·중국·남양 군도에 일본군 300만명이 있었으니, 20만명설이 맞다면 일본군은 병사 15명당 1명의 조선인 군 위안부를 둔 게 된다. 현재도 우리나라에 주둔하는 미군 부대 근처에 반드시 기지촌이 있듯이 동서고금의 모든 군대는 병사의 성 욕망을 해결할 수단을 강구한다. 그 사실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저 수치는 정상이 아니다. 일본군은 새로운 점령지마다 현지인으로 이루어진 군 위안소를 추가한 데다, 그것도 모자라 강간을 일삼았다. 이 모든 게 사실이면, 일본은 원자폭탄이 아니라 불철주야 성폭행만 하느라 전쟁에서 진 거다. 참고로 최근 중국 연구자들은 최소 20만명의 중국인 군 위안부가 있었고, 강간을 당한 중국 부녀자의 수는 그것보다 많다고 주장한다.

20만명설은, 일제가 전쟁에 필요한 노동력을 징발하려고 만든 정신근로대와 군 위안부를 구별하지 않은 숫자다. 한국은 피해를 강조하고 일본의 야만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군 위안부의 숫자는 늘리고, 그들의 평균연령은 낮춘다. 하지만 20만명이 아닌 5만~7만명이면 일본의 야만성이 경감되고 책임이 없어지는가? 또 조선인 군 위안부의 평균연령이 25세면 10대는 아니었다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일제를 가리켜 인간적이었다고 할 것인가? 어느 경우든, 실체를 밝히는 것이 일본 옹호의 논리가 될 수는 없다.

일본은 고노 담화 이전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군인들이 ‘관리’는 했지만 직접 모집하거나 영업은 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해왔고, 바로 이것이 군 위안부 실체를 규명하는 가장 큰 쟁점이 되고 있다. 그러니 ①모집 ②영업 ③관리로 나누어 이 문제를 살펴보자.

①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일제 35년의 성격을 들여다봐야 한다. 2012년, 중국·인도네시아·베트남 등지에서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강제 연행 증거가 나오기도 했다지만, 조선은 전쟁터가 아니었다. 한·일합방이 된 1910년 이후, 조선은 일본과 형식상 한 나라가 됐다. 1등 시민인 일본인과 2등 시민인 조선인의 차이는 미국에서 흑인이 백인에게 당하는 차별보다 더 컸으면 컸지 작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조선은 행정제도와 법이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군 위안부 대량 조달에는 잘 구비된 행정력이 동원되었을 것이고, 그것을 등에 업은 업자와 포주가 활동했다. 이때 취업 사기를 치러 온 업자에게 현지의 정보를 귀띔해주고 그들에게 공신력을 빌려준 장본인이 주민 사정에 밝은 면장이나 이장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강제 연행 사례가 전무하다고 뻗대는 것은 억지일 것이다.

일본군의 군 위안소 운영 여부를 따지는 ②는 상식적으로 풀이할 수 있다. 무기와 식량은 군대에 필수적이지만, 군인이 직접 총을 만들거나 땅을 갈지 않는다. 총은 방위 업체가, 쌀은 농부가 생산한다. 마찬가지로, 지역과 시기에 따라 변수가 있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 군 위안소는 민간 업자에게 맡겨졌을 것이다.

③은 일본 정부가 인정한 것이다. 군대가 위안부의 위생을 직접 관리한 이유는 성병이 전력 차질을 낳기 때문이다. 국내 같으면 보건소가 했겠지만 전쟁 지역에서 그 일을 도맡아 할 기관은 군대밖에 없었다. 그뿐 아니라, 군대는 군 위안부의 이송에도 관여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① ②와 직접 연관된 정황이 미미하다고 해서 일본군이나 일본 정부, 그리고 천황(일왕)이 면죄되지는 않는다. 우선 일본군이 일본 정부에 위안부 설치를 요청했던 증거가 뻔히 나와 있다. 더욱이 애초에 일제 식민이 없었고,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군 위안소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광수나 윤치호의 친일을 단죄하는 이유

일제강점기의 조선은 저항과 협력이 공존했던 공간이다. 2등 시민이라는 차별에도 불구하고 한·일합방 이후에 태어난 가난한 계층과 여성 가운데 혹여 일본을 조국으로 착각하고 ‘동지의식’을 느낀 사람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20여 년 넘게 일제 통치에 내면화(세뇌)된 때문이지 결코 그들의 허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보다 더 많이 배우고 견문을 넓힐 수 있었던 이광수나 윤치호의 친일을 단죄하는 것이다. 그들은 일제에 세뇌된 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일본을 선택했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는 “‘강제 연행’을 하지 않았다 해도 ‘강제로 끌려가는’ 이들을 양산한 구조를 만든 것이 일본군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며, 그런 반성 위에 일본 정부가 “새로운 사죄와 보상”을 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여기에 덧붙여야 할 것이라고는 “우리 안에도 위안부들에게 ‘사죄’해야 할 이들은 있다”라는 것 정도다. 하지만 사태를 하나로 묶고 파악하는 이런 총체적 관점은, 군 위안부를 착취한 일본군의 “하나가 아닌”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려는 지은이의 강박 때문에 휘발되고 말았다. 군 위안부에 대한 천편일률적인 기억과는 다른 기억을 보충하겠다고 그들과 일본군 사이에 흘렀던 감정적 교류마저 나열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총체성을 흠집 내는 이런 다양성(나열)이 오해를 양산한다.

2013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글렌데일 시민공원에 위안부 소녀상이 세워졌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부끄러웠다. 원래 저 소녀상은 미국에 있기 전, 먼저 서대문형무소 자리에 조성된 독립공원에 세워져야 했다. 하지만 2008년 광복회를 비롯한 독립운동 유관단체들은 독립공원 내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난을 보여주는 박물관을 세우는 것은 “독립운동가들과 독립운동을 폄하시키는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면서 박물관 건립을 저지했다. 그래서 서울 마포구 성미산에 따로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을 지었다. 이처럼 민족의 역사는 자신의 가장 영광스럽고 순수한 기억만 보존하고 거기에 맞지 않는 것은 억압한다. 한때는 저런 잘못된 구습의 피해자였던 일본군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가 <제국의 위안부>를 놓고서는 자신과 다른 기억을 발굴했다는 이유로 고소를 했다.

원문: 장정일의 독서일기, 그 소식에 나는 부끄러웠다 (시사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