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위안부’ 형사 2심 판결문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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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의적인 판결

2017년10월27일, 서울고등법원은 나의 책 ‘제국의 위안부-식민지 지배와 기억의 투쟁’을 위안부에 대한 명예훼손을 한 책으로 판단하고 벌금 1000만원의 유죄판결을 내렸다. 2017년 1월 1심에서의 무죄 판결이후 나를 유죄로 판결할 만한 새로운 ‘증거’가 나온 것이 아님에도 무죄판결을 뒤집은 것이다.
말하자면, 2심은 같은 책에 대한 판단을 증거가 아니라, 책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만으로 뒤집었다. 당연히 승복할 수 없었고 나와 변호사는 곧바로(10월30일) 상고했다. 법원에 제출할 상고이유서는 더 자세히, 구체적으로 쓰게 되겠지만, 아래는 재판부뿐 아니라 보다 많은 이들이 이 사태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우선 간단히 써보는 글이다.

2심 판결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제국의 위안부’는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성노예가 된 조선인위안부’와는 다른 위안부상을 보여 주고 있다. 또 저자는 ‘조선인위안부의 고통’에 관해서도 이 책에 쓰고 있다. 하지만 그런 인식을 책에서의 기술 전부에 쓰고 있지는 않다. 그 때문에 ‘자발적 매춘부였던 일본인위안부와는 다른, 성노예 조선인위안부’라는, 우리사회와 국제사회가 공유하는 인식과는 다른 인식을 독자가 갖도록 만들 가능성이 있다. 즉 ‘조선인 위안부=자발적 매춘부’라는 인식이다. 또한 유엔보고서등 국제사회와 일본의 고노담화등이 제시하는 인식에 따르면 위안부가 ‘자발적 매춘부’라는 인식은 명백한 허위이다. 저자의 인식을 허위로 단정하는 이유는 국제사회의 인식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인식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국제사회의 인식을 저자는 잘 알고 있었을 텐데도 그와 다른 인식을 말했다. 말하자면 ‘허위’를 말했을 뿐 아니라, 그 사실을 말하면 대상의 사회적 평가가 저하될 것인지를 인식했는지 여부도 명예훼손 여부 판정에서는 중요한데, 저자는 오래 위안부문제를 연구했으므로 그 파생효과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허위사실 적시와 집필목적에서 ‘고의(범의)’가 인정되므로 유죄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2심 판결은 ‘독자의 독해에 저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결이었다.

나에게 내려진 ‘벌금 1,000만원’을 검찰이 구형한 3년 징역형보다 가벼워서 다행이라고 말하는 (혹은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1,000만원이라는 액수는 징역이라면 5년에 해당하는, 명예훼손 관련 벌금형이 선택할 수 있는 최고금액이다. 재판부는 관대한 처분을 내린 것처럼 강조했지만 징역형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 실제로는 3년 이상의 징역 형에 해당하는 처벌이다. 그러면서도 재판부는 마치 ‘학문의 자유’를 옹호하는 듯한 포즈를 취했다.

명예훼손법률상 유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해당내용이 ‘사실’이어야 할 것이 첫번째 조건이 된다. 나에게 무죄를 내린 1심은 검찰이 지적한 35곳 중 30곳을 ‘의견표명’으로 규정하고 처음부터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나머지 5곳은 ‘사실’에 관한 기술로 규정하면서도 위안부의 사회적평가를 저하시키는 표현이 아니라거나, 개개인을 특정한 것이 아니므로 명예훼손이 아니라고 했다. 또한 저자에게 명예훼손을 하려는 목적(고의)이 있었다고 볼 수 없고 “위안부문제는 국민들이 알아야 할 공공성/사회성을 갖는 공적관심사항이므로 활발한 공개토론과 여론형성을 위해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 해야 한다면서 무죄를 내렸던 것이다.

이렇게 판단하기까지 1심재판부는 무려 1년에 걸쳐 10회 넘게 재판을 진행했고, 본재판 이후에는 매번 아침부터 저녁까지 긴 시간을 들여 재판을 진행했다. 검사는 나를 비판한 학자들의 논리를 들고 와 나의 ‘범죄’를 주장했고, 결국 법정에서의 공방은 학술세미나와 다름없는 내용이 되었다. 그에 비해 2심은 고작 4번 진행되었고, 매번 한두시간만에 끝났다. 그렇다면 1심에서 제출된 방대한 자료를 세심하게 봐야만 이 사건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었을 터인데 2심 판결은 결코 그랬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2. 왜곡과 소송의 본질

이 판결의 가장 큰 문제점은 검사가 제출한 왜곡된 책 요약(악의적인 독해)을 그대로 차용해 사용했다는 점이다. 아래에 인용해 두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책의 취지를 충분히 살펴 요약하면서도, 결국은 내가 가장 신경을 써서 독자의 오해가 없도록 쓴 부분에 관해 재판부는 검사가 멋대로 왜곡한 요약을 가져와 내가 한 말처럼 왜곡했다. 하지만 나는 결코 ‘위안부는 강제 연행되지 않았다’고 쓰지 않았다. 일본군의 모집과 관여/관리도 부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어떤 방식으로 관여했는지 자세히 썼다.

“조선인 위안부가 해야 할 일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면서 본인 혹은 부모의 선택에 의해 자발적으로 갔다” 고 요약된 부분도 엉터리 요약이고, “본인의 의사에 반해 위안부를 하게 되는 경우는 없었다”는 것도 내 말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이들을 비판하기 위해 인용한 위안부 비판자들의 말이다. “1996년 시점에서 위안부란 근본적으로 매춘의 틀 안에 있던 여성들” (42)이라는 표현 역시 재판부가 인용한 유엔보고서의 내용이다. 이런 논리라면 박유하가 `위안부는 자발적매춘부`라고 했다고 보도해 온 모든 언론과 개인도 명예훼손으로 고소되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또한 나는 “법률상 배상책임이나 공식사죄를 받을 수도 없다” (2)고 한 적이 없다. 나는 그런 방식만을 지고지선의 해결방법으로 생각해 온 지원단체의 운동방식과 논리에 의문을 제기했을 뿐이다. “공식사죄를 받을 수 없다”가 아니라 20년 이상 법적책임만을 주장해온 지원단체 생각에도 문제가 있어 보이니 한일협의체를 만들어 다시 논의하자는 것이 내가 책에 쓴 내용이다. 한국판 간행 이후 나온 일본판에서는 `국회결의`가 필요하다고 썼다.

내가 “피고인이 주장하는 해결방식을 제시” (39)했다는 말은 감사의 주장인데, 앞에서 쓴 것처럼 나는 한국어판에서는 구체적인 해결방식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원고측도, 검사도 재판과정에서 내내 이런 말로 비난했는데 실은 이 주장에 ‘제국의 위안부’ 소송의 본질이 있다. 원고측(지원단체)이 소송을 시작한 건 사실, `위안부의 명예`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운동의 정당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나의 책은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 이라는 부제목에서 나타낸 것처럼 90년대 이후 위안부문제지원운동의 문제를 비판한 책이기도 한데, 그것이 고발의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주장해 온 `법적책임`에 대해 아는 분들은 최소한 내가 만난 위안부 할머니들 중에는 안 계셨다.

3. ‘사실적시’라는 전제에 대해

이 판결은 나의 책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기도 하다.

“피고인이 이 사건 도서에서 모든 조선인 위안부들이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된 것이 아니고 직접적인 폭행·협박 또는 기망·유혹에 의해 위안부가 된 경우가 있으며, 일본국이나 일본군이 공식적으로 강제연행을 한 증거가 없으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고, 민간인 포주나 업자에 의하여 강제력이 행사되었으며, 성적학대의 대가로 지급된 것은 소액인데다 그나마도 착취당했고, 일부 조선인 위안부들이 일본군과 협력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등 내용을 함께 서술하고 있다.”(32)
“피고인은 이 사건 도서에서 ‘조선인 위안부들을 모집한 주체는 일본군이 아니라 업자들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불법적인 모집방법이 사용되었다. 일부 위안부들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연행된 경우도 있었다. 조선인위안부들은 가난, 가부장제, 국가주의에 의하여 위안부가 되었다. 위안소 내에서 민간인 포주나 업자에 의해 강제력이 행사되었고, 성적학대의 대가로 지급된 것은 소액인데다 그나마 착취당했다. 조선인 위안부들은 식민지인으로서 애국이 강제되었고, 일부 위안부들은 일본군과 동지적관계에 있었다’는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37)
“피고인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는 사회구조적 요인이 존재하고 조선인일본군 위안부들의 모습이나 처지가 매우 다양하며, 이 사건 도서는 피고인이 기존 자료를 토대로 현재 우리사회 주류적인 시각과는 다른 입장에서 위안부문제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는 내용이고, 이 사건 도서 곳곳에서 여러 예외적인 경우와 다양한 위안부들의 모습이나 처지가 서술되어 있다.”(41)

“예외적”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쓴 사람의 견해가 드러나 있어 꼭 전부가 완전한 건 아니지만 나의 책의 의도를 어느 정도 이해한 요약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유죄가 내려졌을까?

사실 나는 명예훼손 소송에서는 ‘의견’인지 ‘사실’인지가 중요하다고 듣고 학술적인 책에서의 모든 기술은 기본적으로 의견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물론 학문이란 `진실`을 찾는 과정이지만, 아무리 내가 알게 된 사항을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해도, 내가 믿었던 `사실` 역시 언제고 새로운 탐구와 학설에 의해 부정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모든 학문은 `의견`일 수 밖에 없다.

실제로 헤이든 화이트의 ‘메타역사'(1973)이후, 객관적인 사실을 기술한 것처럼 보이는 역사서조차, 입수된 자료를 두고 학자가 문학적상상력으로 엮은 `문학`일 수 밖에 없다는 인식은 점차 상식이 되고 있는 중이다. 다수의 지지와 검증을 거친 가설들이 세월과 공간을 넘어 ‘진리’, ‘사실’로 정착되어 오긴 했지만 그 모든 것은 문학적 플롯을 필요로 하고 그러한 플롯을 만드는 것은 보이지 않는 이데올로기라는 인식은 과거의 역사에 겸허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말하자면 모든 역사서/학술서는 ‘진실=사실’을 추구하는 것이되 하나의 사항을 최종적 ‘사실’로 단정할 수 있는 사람은 논리적으로는 없다. 어디까지나 그 시점에서의 ‘인식’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더구나 나의 문맥이나 표현자체도 ‘의견’으로서 표현한 곳이 많다. ‘제국의 위안부’는 역사자체보다 증언을 포함해 역사를 둘러싼 담론을 분석한 학술적 비평서이기 때문이다.

4. ‘사회적 평가 저하’라는 인식에 대해

재판부는 결과적으로 나의 책이 위안부 할머니들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 시킨다고 말한다. 재판부가 말하는 ‘사회적 평가 저하’란 위안부 할머니들이 ‘강제연행을 주장’ 하고 있는데 그와 반대되는 듯한 말을 하는 것은 그런 주장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내 책을 읽은 이들 중에는 오히려 위안부 문제를 더 생각하게 보게 되었고, 이전에 못 느꼈던 슬픔을 느꼈다고 말해 준 사람이 적지 않다. 오로지 그들의 독해만이 옳다고 주장하지는 않겠지만, 이 판결은 그렇게 읽은 모든 이들을 무시한 판결이다. 대신 저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읽을 (수 있는) 이들의 존재와 그렇게 유인한 이들의 오독의 ‘가능성’을 편파적으로 우선시했다. 나에 대한 유죄판결은 그렇게 내려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제국의 위안부’는 역사서라기보다는 역사를 둘러싼 담론을 분석한 메타역사서다. 한국과 일본의 여러 층위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썼고, 하나의 ‘진실’ 자체보다 눈앞에 있는 진실(대상/정황)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를 모색한 이유이기도 하다. 필요한 만큼 ‘사실’에 접근할 수 있도록 노력했지만, 그 이상으로, 그 ‘사실’을 둘러싸고 대립중인 이들이 서로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기를 지향하면서 쓴 책이다. 접점을 찾기 위해 양국 정부와 지원단체를 비판했지만, 위안부에 대해서는 부정도 비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시도한 건 오히려 그동안 지원단체가 묵과하거나 은폐했던 목소리를 살려내는 일이었다. 그동안 의식/ 무의식적으로 묻혀 왔던 그 모든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야 말로 과거와의 대면에서 성실한 방식– 바람직한 ‘역사와 마주하는 방식’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판부는 나의 그런 시도를 인정하면서도, 나의 책에 반발한 지원단체(와 검찰)의 나의 책에 대한 왜곡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조차 제대로 읽고 있었다는 흔적을 남기면서도, 이 판결은 결국 재판부 자신을 포함한 모든 독자를 무시한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판결문에 일부 요약된 것처럼, 나는 ‘위안부의 자발성’을 강조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구조를 만든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비판했다. 설사 자발적으로 간 위안부가 있다 하더라도, 그 대부분은 가족을 위해 희생한 경우라고도 썼다. ‘(관리) 매춘’이라는 단어는 재판부가 인용한 유엔보고서와 여러 학자들이 사용하는, 가치평가와는 무관한 중립적인, 하나의 정황설명일 뿐이다. 문맥이나 의도와 상관없이 하나의 단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유죄가 되어야 한다면, 1996년에 보고서를 작성한 유엔보고관, 그리고 일본군위안소를 국가가 관리한 공창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고 있는 다른 모든 학자들도 기소되고 유죄가 내려져야 한다.

5. ‘허위’라는 인식에 대해

재판부가 나의 책을 허위라고 말하기 위해 인용한 자료는 90년대 중반, 즉 20년도 더 전에 나온 자료들이다. 그나마 고노담화는 일본정부가 직접 조사해 내놓은 견해지만, 다른 유엔보고서나 국제사법위윈회의 자료는 위안부문제가 문제로서 발생되기 시작한 초기에 지원단체들이 유엔등 국제사회에 제출한 자료등을 비전문가들이 검토해 나온 자료다.

물론 유엔의 쿠마라스와미보고서는 일본이나 한국, 그리고 북한에서 학자나 위안부의 증언을 듣고 종합한 보고서다. 그리고 그들의 의견을 공정하게 취합하려 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이 보고서는 지금은 부정되고 있는 (이 문제해결을 위해 오랜 기간 노력해온 와다 하루키 교수조차 작년에 낸 책에서 요시다증언을 부정했다)요시다 증언등을 근거로 나온 보고서다. 그리고 동시대에 벌어졌던 유럽등 내전에서의 강간/학살과 똑같은 것으로 이해한 흔적이 있다.

하지만 학계는 이후 20년이상 연구를 진행했고 지금은 학계에서 ‘일본군에 의한 조선인위안부의 물리적 강제연행’을 말하는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없다. 강제동원을 주장했던 이들은 지금은 동원에서의 강제가 아니라 위안소에서 부자유했다는 식으로 내용을 바꿔서 여전히 똑같은 ‘강제성’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연구자나 지원단체관계자들이 그런 정황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변함없이 ‘강제연행’에 집착하고 주장하는 이유는 그들이 주장해 온 ‘법적책임’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 방식만이 정의로운 사죄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나의 책을 ‘허위’라면서 고발한 이유는, 위안부할머니를 모욕하거나 일본의 책임을 부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오랫동안 주장해 온 ‘법적책임’의 가능성에 내가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원단체의 사고에 의문을 제기한 나를 ‘일본을 면죄하는 것’이라며 목청높여 비난하고 급기야 고발/기소에 이른 원고측과 검찰의 주장을 2심 재판부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재판부의 판결문은 1심에서 제출한 방대한 나의 자료를 완벽하게 무시했음을 보여준다.

재판부는 나의 책을 “조선인 위안부들은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되어 경제적 댓가를 받고 성매매를 했다`(31)”,” 일본국과 일본군은 조선인 위안부를 강제동원하거나 강제연행하지 않았다” 고 했다고 요약한다. 그러면서 “조선인 위안부는 대부분 일본국가나 일본군의 지시에 따라 자신들의 의사에 반해 강제로 동원되어 일본군 위안소에서 성적 학대를 당하며 성노예로서의 생활을 강요당했다`” (31)는 것이야말로 “사실” 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모집은 했지만 일본군이 납치나 속임수를 허용한 정황이 없고 “공적으로는” (즉 공식적으로 강제연행을 지시한 흔적이 없고 오히려 그에 반하는 정황이 증언/수기등에서 보인다) 오히려 그런 정황을 단속한 정황이 보인다고 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위안부할머니들이 말하는 ‘강제연행’을 부정한 것도 아니다. 당사자의 증언은 기본적으로 존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다만, 경찰과 같이 혹은 혼자 나타난 ‘군인’처럼 보였던 이들은 군속대우를 받고 군복을 지급받은 업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재판부는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한 곳을 나의 글로 착각하고, 그 부분에 내가 일일이 그에 반하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부분을 ‘범죄’로 단정했다. 하지만 그런 부분들은 대부분, 말한 이들을 비판하는 문맥, 혹은 전체를 정리하는 부분에서 쓰인 내용들이다. 오히려 지적된 대부분 앞뒤에 반박/비판이 들어가 있는데도. 그런 문맥을 무시하고 단어에만 반응한 셈이다.

재판부는 유엔보고서에 나오는 “일본정부가 강간수용소의 설립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위안부를 조달하기 위해 일본군부는 물리적 폭력, 유괴 강요와 속임수를 동원했다” (34)는 말, 일본군이 여성이나 소녀들이 “자발적으로 신청한 것처럼 꾸미기 위해 업자에게 적극적 지원을 부여했다” 는 말을 인용하면서 이 인식이 “위안부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객관적인 사실” 이라고 주장한다(36). 나의 책은 이런 “중요한 부분이 사실과 합치하지 않”기 때문에 “허위” 라는 것이다.

재판부가 유엔보고서쪽이 진실일 것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국제사회’라는 단어를 무조건 권위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원고측과 검찰이 그렇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원고측은 그동안 나온 국제보고서들과 고노담화를 나의 ‘범죄’를 증명하는 자료로 검찰과 재판부에 제출했다. 이들의 고소/기소 취지는 말하자면 ‘국제사회는 물론 일본까지 공유하는 인식을 박유하가 혼자 부정하고 있다’였다.

하지만 나는 고노담화를 부정하기는 커녕 오히려 높이 평가했다. 다만 해석을 달리 했을 뿐이다. 지원단체는 예전에는 고노담화가 강제성을 부정한 것이라면서 미봉책으로 치부하고 비판했었다. 그러다가 아베정권에서 고노담화가 재검증대상이 되자 갑자기 고노담화가 ‘강제성’을 인정한 것이라면서 지키기에 나섰을 뿐이다.
그런데, 고노담화를 만든 전 관방장관은 나의 기소반대성명에 서명하기도 했다(2015/11,http://www.ptkks.net/approval/). 나의 해석이 그의 의도에 반하는 것이었다면 그가 참여했을 리가 없다.

재판부는 국제보고서의 ‘성노예’인식이 옳고, 나의 책은 그에 반하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나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지원단체의 성노예인식에는 이의를 제기했지만, 동시에 위안부가 분명히 `성노예적`존재라고 썼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하지만 피고인은 처음에는 일부 그런 경우도 있다고 하거나 여러가지 경우가 있다는 식으로 서술하다가 이 사건 표현들에서는 이러한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 서술하거나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위 표현을 접하는 독자들은 ‘전체는 아니더라도 대부분 또는 많은 조선인 위안부`들은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되어 경제적 대가를 받고 성매매를 하였고, 애국적으로 일본군과 협력하고 함께 전쟁을 수행했으며 일본국과 일본군은 조선인 위안부를 강제동원하거나 강제연행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서술되어 있고, 이러한 내용이 객관적인 사실과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사건 표현들은 허위사실에 해당한다”(37)고 말한다.

이런 재판부의 인식은 ‘자발적 매춘부’라면 피해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만든 것이기도 한데, 원래는 지원단체의 인식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위안부 문제의 중심에 있던 이들이 오히려 ‘매춘’에 대해 차별적인 생각을 스스로 가졌거나(그들이 오로지 ‘순결한 소녀상’에 집착해 온 이유이기도 하다). 20년 이상 여성인권운동을 하면서, 사회가 필요시하고 차별해 온 문제를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시도한 나를 죄인으로 치부하고 고발한 것이다. 재판부는 그러한 상황을 모르는 채로, ‘사회가 위안부를 차별(사회적 평가 저하) 할 수 있으니 (저자의 의도가 그게 아니더라도) 처벌한다’ 고 한 셈이다.

6. 인물특정 여부에 대해

재판부는 나의 책이 특정 위안부를 지칭해 명예훼손을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다. 그리고 2심 재판부의 말이 맞다면 오히려 원고로 이름이 올라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이 개별적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누구의 이름도 의식하지 않고 책을 썼다. 그런데 원고측이(검찰이) 나의 ‘허위’ 를 증명하기 위해 재판부에 제출한 나눔의 집 거주 다섯분의 구술서에 따르면 오히려 아무도 그런 경험을 한 분은 없다. 심지어 그 중에는 ‘보국대’로 갔다고 말한 분조차 있다.

그런데 재판부는 내가 집필목적에 대해 쓴 서문중에서

“말하자면 한일양국은 20여년의 역사문제갈등을 거치면서 심각한 소통부재 상황에 빠져 버렸다. (중략) 그 갈등의 중심에 위안부문제가 있고, 그들(일본의 부정자)은 한국이 세계를 향해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일본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한번 원점으로 돌아가 위안부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했다” (38-39)라는 서문일부와, 이하 인용한 부분을 가져와 내가 구체적으로 문제해결을 위해 나서고 있는 위안부를 특정했다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그런데 현재 한국과 일본사이 위안부 문제의 중심에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밝히고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있다. 피고인도 이 사건 도서에서 [한국의 위안부들과 지원단체는 그 후에도 일본정부와 세계를 상대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일본의 사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세계적인 문제로 간주되고 있지만, 다른 나라는 사죄를 받아들였으므로 현재의 위안부 문제란 실은 이 몇십명의 위안부와 위안부지원단체가 주체가 된 한국인 위안부문제이기도 하다(171)] 라고 썼다” 면서 “스스로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나타내고 있는 사람에게만 명예훼손 문제가 생길 뿐” 이므로 “제3자가 일본군 위안부를 생각할 때는 전체 ‘조선인 위안부’보다는 우선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임을 밝힌 ‘위안부피해자’들을 떠올리게 된다” 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위안부를 “특정” 했다고 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 인용된 부분에서 내가 강조한 건 ‘한일갈등의 중심에 위안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일 뿐, ‘갈등을 빚고 있는 그 위안부’가 아니다. 이 부분에서도, 책 전체에서도 나는 위안부에게 잘못이 있다거나, 사죄요구가 옳지 않다고 쓴 적이 없다. 일부 할머니들에게 주어진 정보가 과연 정확했는지, 그렇게 생각하도록 이끈 지원단체의 사고가 과연 절대선인지를 의문시했을 뿐이다. 무엇보다 300쪽이 넘는 나의 책을 읽으면서 위안부의 슬픔을 느꼈다는 이들은 대부분 재판부나 원고가 말하는 ‘특정한 그 위안부’가 아니라 ‘이름모를 위안부’, ‘전쟁터에서 동원된 위안부’를 떠올린 이들일 것이다. 그런 독자들이 실재하는 한 2심 재판부의 판단은 편파적이고 자의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

만일 내가 위안부문제를 그저 ‘사죄보상을 요구하는 그 위안부들의 문제’로 생각했다면 애써 ‘위안부의 슬픔과 고통’을 전하려는 책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나는 위안부문제를 부정하는 이들을 구체적으로 비판했다. 기존지원단체과 같은 규탄이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에 귀를 기울이면서, 문제적인 생각을 비판했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과거의 위안부’의 실상을 보여주는 추상적인 ‘위안부’가 있고, 현재의 한일갈등의 중심인 구체적인 ‘위안부’ 할머니가 있다. 나의 책은 후자에도 주목했지만, 고찰 대상은 어디까지나 전자였다. 검찰이 매춘/강제성/동지적관계, 이 세 부분을 문제삼았다는 것은 전자를 문제삼아 기소한 것이기도 하다. ‘과거의 이름모를 위안부’를 포함해 모든 (추상적) 위안부에 관해 쓴 부분에 주목하면서 내가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현재의 구체적인) 위안부’를 특정했다는 말은 그들의 기소취지에 비추어 봐도 비논리적이다. 설사 오로지 나의 책을 읽고 현재의 위안부만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것을 의도하지 않은 한 그건 저자의 책임일 수 없다. 나의 고찰 대상이 어디까지나 전쟁터에서 사망한 ‘그녀들 모두’였다는 건 위안부에 대해 설명한 책의 1부를 이렇게 끝맺었다는 만으로도 분명하다. (2부와 3부는 90년대 이후의 갈등양상에 대해 썼고 4부는 현대가 과거를 반복하고 있는 구조에 대해 썼다)

“아마도 우리가 지금 귀기울여야 하는 것은 누구보다도 이들이 아닐까. 전쟁터의 최전선에서 일본군과 마지막까지 함께 하다 생명을 잃은 이들—말없는 그녀들의 목소리에. 일본이 사죄해야 하는 대상도 어쩌면 누구보다도 먼저 이들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언어와 이름을 잃은채로 성과 생명을 ‘국가를 위해’바쳐야 했던 조선의 여성들. ‘제국의 위안부’들에게.” (104)

7. 목적 (“고의”)에 대해- ‘사회적 평가저하’를 한 건 누구인가?

재판부는 나의 책이 다양한 위안부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피고인은 이 사건 표현들에서는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 서술하지 않거나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이를 접하는 독자들은 마치 대부분 또는 많은 ‘조선인 위안부’들은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되어 경제적 대가를 받고 성매매를 하였고 애국적으로 일본군에 협력하고 함께 전쟁을 수행했으며 일본국과 일본군은 조선인 위안부를 강제동원하거나 강제연행하지 않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 피고인도 이러한 점을 인식하면서 이 사건 표현들을 서술하였다고 보인다”고 했다 (41).

그러면서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면 피고인이 이 사건 도서를 집필한 목적, 이 사건 도서의 성격 및 전체내용을 감안하더라도 피고인은 이 사건 표현들에서 적시한 사실이 허위인 점과 그 사실이 피해자들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 시킬 만한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였다고 보인다. 피고인에게 명예훼손 고의가 인정된다” 는 것이다. (41-41)

말하자면 재판부는 그저 ‘가능성’을 처벌하고자 했고, 그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책의 모든 부분에서 재판부 스스로가 옳게 요약하기도 한 나의 책의 취지를 반복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책이라는 매체가 한 개인의 표현이기도 한 이상, 이런 생각은 개인의 표현방식에까지 국가가 관여해야겠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일본과 한국의 독자를 동시에 염두에 두면서 책을 썼고 각각의 부분에서 그 독자들을 떠올리며 글을 써 나갔다. 같은 소재를 두고 약간 다른 뉘앙스로 기술한 부분들이 존재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의 진실을 가능한 한 보되 더 중요한 건 그 진실을 ‘어떻게 생각할 지’ 여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원고와 검찰과 재판부는 나의 책이 정작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말하는 이들에 대해 비판한 책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부분을 완전히 도외시하고 단어에만 집착했다. 하지만 단어자체가 문제라면, 나를 고발한 이후 언론이 나를 비난하면서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라고 한 박유하”라고 반복해 온 시간들, 이 3년반의 시간들이야말로 위안부 할머니들에게는 모욕적인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나는 위안부를 비방할 의도가 있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을 웬만한 독해력을 가진 독자라면 반복하지 않아도 알 수 있도록 썼다. 책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한발 더 나아가 ‘악의적’으로 읽는 독자가 설사 있다 해도 그건 저자의 책임이 아니다.

내가 이 책에서 강조한 건 ‘강제로 끌려간 순결한 소녀’만 피해자로 생각하는 우리사회의 인식이 오히려 그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 이들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상황이었다. 설사 자발적으로 갔다 해도 그 사실이 은폐될 이유가 없다고 강조한 이유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 50년 가까이 위안부 체험을 한 이들이 침묵해야 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들로 하여금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운 지원자들조차, 그러한 구조를 오히려 공고히 해 버린 건 단순한 오해나 시대적인 문제가 만든 것으로 보이지만, 이후 운동의 확산을 위해 전략적인 것으로 바뀌어 간 측면이 있다. 나는 그 전략을 이해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 전략이 결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명백히 적어둔 나의 집필목적을 왜곡해가면서까지 지원단체들이 주장하는 대로 고의/범의를 보려 했다.

물론, 우리사회의 매춘에 대한 인식—‘사회적 평가 저하’를 재판부가 우려하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책이 나온 후 나의 책을 근거로 그저 ‘위안부는 매춘부’로 생각하고 위안부에 대해 비판적이 된 이는 내가 알기로는 없다. 그렇게 읽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그저 나의 책을 멋대로 왜곡해 자신들이 이미 해 왔던 말을 보완하기 위해 이용한 이들일 뿐이다. 중요한 건 매춘여부가 아니라 그 여성들의 삶에 대한 이해여부다. 나는 오로지 그 옛날 소녀/여성들의 신산한 삶을 더 많은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기를 지향하며 자료와 글쓰기 방식을 골랐다. 그런 나의 책을 왜곡한 건 그 반대편에 있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렇게 대립해 온 이들의 접점을 찾기 위해 이 책을 썼지만 결과적으로 나의 책을 있는 대로 받아들여 준 건 그들과는 상관없는 일반독자들이었다. 이번 판결은 그렇게 ‘오독하는 독자들 ‘, ‘혹은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독자들’을 우선시한, 사회적 성숙을 오히려 퇴보시키는 판결이다.

8. 식민지 트라우마

원고측과 검찰과 재판부의 생각과 판단의 저변에는 우리의 식민지 트라우마가 있다.

예를 들면 재판부는 내가 일본인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가 일본군과 ‘기본적인 관계는 같다’고 한 부분을 들어 문제시했다. 물론 나는 완전히 같지 않다고 분명히 썼고, 조선인은 기본적으로 차별구조 속에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가에 동원되어 다수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하는 생활이 가져다 준 ‘여성’으로서의 고통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가 없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전대표를 비롯해 여러 학자들이 위안부속에서 굳이 한일차이를 보고 싶어 하는 건 그들이 인간의 아이덴티티를 성보다 민족에서 보고 싶어한 결과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의 아이덴티티는 다양하고 조선인 여성이 위안부가 된 것이 ‘여성’이기 때문이었는지, ‘조선인’이기 때문이었는지는 한마디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그 양쪽에 다 이유가 있었다고 썼다. 하지만 기존학자 대부분은 ‘여성의 인권’을 앞세워 운동과 연구를 해 왔으면서도, ‘일본’국적을 갖고 태어난 ‘여성’의 인권은 애써 무시 혹은 간과해 왔다. 그건 세계연대를 위해 ‘여성문제’임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조선인 위안부의 ‘여성’으로서의 고난 역시 도외시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녀들은 ‘여성’이면서도 공적으로는 ‘남성’을 비판할 수 없었고, 자신들을 착취한 ‘계급’의 문제를 말하지도 못했다. 물론 증언에서는 그런 구조를 충분히 말했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나는 그렇게 묻혔던 말들을 살려내 언어화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나의 생각이 옳다고만 여기서 말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지원단체와 일부 학자는 자신들의 인식만이 절대 옳은 것으로 간주하고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의 입을 막으려 했다. 혹은 재판 중에 나를 비판하는 일로 직간접으로 고발에 가담했다. 역사학자들은 ‘역사서’를 지향한 것이 아닌 이 책을 두고 ‘역사서’의 형식을 갖추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더구나 그들은 나의 책이 이른바 일본우익의 책과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일본우익과 같다고 외치는 일로 나에 대한 국민비난을 조장하고, 대중에 의한 끔찍한 여성혐오적 비난과 협박을 방치했다. 이것이 대한민국과 재일교포 ‘페미니스트’와 위안부관련 학자와 지원단체 관계자들이 지난 3년 반 동안 보여준 모습이었다. 그런데 2심 재판부는 결국 그들의 손을 든 것이다.

재판부는 ‘동지적 관계’도 ‘허위’로 판단했지만, 나는 ‘군수품으로서의 동지’라고 분명히 적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 나의 책이 ‘애국을 강제했다’고 쓰고 있다고 적고 있으니 내가 강조한 메시지는 분명히 받아든 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원고측과 검찰의 왜곡요약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제국의 위안부’는 ‘위안부가 애국적 자긍적으로 협력하였다’고 썼다고 결론적으로 말한다. (물론 실제로 ‘애국적/자긍적’이었다고 스스로 말한 자료들도 존재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런 목소리까지 포함해 위안부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 일이어야 한다. 한사람의 인간을 진정으로 존중하고 싶다면.)

원고측 고발, 검찰기소, 그리고 이번 형사 2심 판결까지, 이들이 나의 책을 왜곡해 언급할 때마다, 그리고 이들의 말을 그대로 언론이 보도하고 SNS가 확신시킬 때마다, 나는 이들의 ‘허위’사실 유포에 의해 학자로서의 명예에 상처를 입는다.

그런 의미에서 ‘제국의 위안부’로 인해 실제로 ‘사회적평가가 저하’된 건 다름아닌 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원고측-고발자들의 목적이었다. 나에게 이 3년반동안 쏟아진 수많은 비난과 협박들은 그들의 의도가 성공했음을 증명한다.

공정하게 평가해야 할 사법부가 스스로 국가의 얼굴을 한 민간인의 손을 들어 한사람의 학자에게 형사처벌을 내린, 2017년 대한민국의 공간이 내게는 아득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형사1심] 제4회 공판기

제4회 공판기 (2016/11/8)

박유하

11월 8일에 네번째 공판이 있었다. 이번에는 나와 변호인이 제출한 서증(주장의 근거자료)을 검증하는 순서였다.하지만 시간이 충분치 않아 지난 5월에 제출했던 증거자료 43개 에 대해 설명할 수 있었을 뿐이다. 하나의 문서 안에서 여러개 자료를 제시한 경우도 하나로 묶었으므로 실제로는 휠씬 더 많다. 결국 참고자료로 제출한 160개 정도 문서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할 수 없었다. 배춘희 할머니와 나눈 대화의 녹취록도 참고자료로 제출했다.
나의 책이 허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협력이나 자발성 자체를 강조해야 했기에 이번 공판은 특별히 마음이 무거운 자리였다. 나의 책은 그런 것을 강조하는 일 자체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정에서의 공방이란 책의 취지를 협애한 것으로 만드는 행위였다. 물론 그것은 내가 시작한 사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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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 가난한 여성이 매춘업에 종사했다는 사실이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ICJ 보고서에도 나온다.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는 마을 이장이 공장 일자리 구해주겠다 약속했고 집이 가난해서 받아들였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ICJ 보고서에도 위안부의 대부분이 ‘가난한 소작농 가족 출신’이라고 나온다. 그리고 원고측 고소보충서에는 센다 가코의 책에서는 일본군 위안부문제가 보여주는 식민지 지배나 문제, 가부장제 문제를 정확하게 볼 수 없다고 쓰여 있는데, 이런 문제를 지적한 것이 바로 피고인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고소보충서 내용과 피고인의 제국의위안부 내용이 큰 차이가 없다. 근대 공창제 하에서 형성된 여성 인신매매 매커니즘과 농촌경제 파탄에서 비롯된 빈곤한 사회경제적 생활이 ‘위안부’ 동원의 배경이 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위안부는 자발적으로 간 것’이라고 피고인이 말했다고 주장할 수가 있는가? 검사의 논리라면 위안부와 ‘매춘’을 연계시켜 언급한 쿠마라스와미는 물론, 정부위원회 보고서 작성자들, 원고측 대리인조차 이 자리에 서야 할 것이다.

검사: 그렇게 씌어 있다.

변호인: 공소사실 12번에 있는 ‘강간적 매춘, 매춘적 강간’의 의미는 ‘위안’이란 매춘과 강간 둘 다 포함한다는 뜻이다.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도 “대가로 돈을 받았고 돈 대신 전표를 받기도 했다. 전쟁이 갑자기 끝나서 자신이나 가족 먹여 살리겠다던 희망도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는 위안부의 증언이 인용되어 있다. 맥두걸 보고서에는 “성노예는 강제매춘의 거의 모든 행태를 포함한다.”고 쓰여 있다. 그러면서 강제매춘에 대해서도 ‘명예와 존엄을 심각하게 훼손한 행위’로 인정했다. ‘전쟁법을 위반한 강제 매춘, 강제 강간’ 등의 표현이 나온다.
또한 검찰이 증거자료로 제출한 정부간행 증언집 <들리나요 열 두 소녀>이야기에도 수익에 대한 부분이 명확히 나온다. ICJ 보고서에는 아예 요금표까지도 나온다.

판사: 정리하면, 변호인의 주장은 <제국의 위안부>에 나오는 매춘, 강간의 혼용 표현이 비단 이 책만이 아니라 쿠마라스와미, 맥두걸 등 여러 국제 보고서에서도 나온다는 주장이다.

검사: 이 책에 기재된 문구는 “위안부를 부정하는 이들은 위안부를 매춘으로만 생각했고 우리는 강간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 두 요소를 모두 포함한 것이었다.” 고 되어 있다. 위안은 매춘과 강간 두 요소를 포함한 것이라는 거다. ‘위안’에 어떤 매춘적 요소가 포함 되어 있었다는 것인가?

변호인: 일본군은 위안부를 관리매춘의 형태로 운영했다. 그 지적이 잘못된 것이라는 말인가?

검사: 일본군이 체계적인 요금 노동시간 등 책정해서 위안부 제도를 처음부터 철저하게 계획하고 관리했다. 변호인이 말한 보고서의 취지는 오히려 그만큼 체계적으로 관리해서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취지로 이해된다. 보고서는 매춘으로 인지했다는 취지의 것이 아니다.

판사: 어쨌든 맥두걸 보고서에도 강제매춘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거 아닌가?

검사: 위안부가 된 건 자발적인 게 아니라 본인 의사에 반해서, 사기나 유인의 방법에 의해서였다. 이게 중심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이 책에서 매춘도 위안의 두 요소 중 하나라고 쓴 뜻은, 위안은 매춘이고 자발성에 기초했다는 거다. 이게 문제라는 거다.

변호인: 피고인이 위안부의 성노예성을 부정했다는 것인가? 하지만 피고인은 책에 이렇게 쓰고 있다. “물론 위안부들은 자신의 몸의 주인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성노예임에 틀림없다. 식민지가 된 나라 백성으로서 일본 국민동원과 모집을 구조적으로 거부할 수 없었다. 정신적 자유와 권리를 빼앗겼다는 점에서 분명 노예였다. 그들이 총체적인 피해자였음은 틀림없다.” 피고인은 성노예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검사: 위안부들은 자발적으로 가지 않았다. 본인 의사에 반해서 간거다. 그런데 피고인이 말하는 성노예라는 건 위안소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성노예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강제로 끌려 왔다는 말이 이 책에 어디 있나? 296쪽 보자. ‘자발적 매춘부라는 기억을 부정’. 그건 우리가 애써 부정해왔다는 말 아닌가?

변호인: “근본적으로 매춘의 틀 안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라는 부분도 기소대상이 되었지만 이 부분은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 대해 언급했을 뿐이다. 여성들이 기만당해 성노예가 된 것이다.
성노예성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라면 검찰의 주장과 결국 다르지 않다.
기소된 30번을 보자. “조선인 위안부란 이렇게 해서 조선이나 중국 여성들이 일본 공창제도에 편입됐다.”이 부분도 다른 학자의 말을 인용한 부분인데 기소되었다. 한국정부산하위원회 보고서 발간서 등도, 공창제에 편입됐다는 식으로, 같은 취지로 설명하고 있다.

검사: 그러면 위안부제도가 합법인가? 아니다, 불법이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똑같이 취급해놓았기 때문에 명예를 훼손한 거라고 주장하는 거다.

판사: 당시 일본 제국 하에서 공창은 합법인 것으로 안다. 위안부의 경우는 어떤가?

검사: 당시 국제법상 불법이다. (판사: 그럼 일본법상으로는? )
다수 학자들이 일본에서 미성년자매춘은 법률로 금하고 있다. 그런데 위안부에는 미성년자가 많았으므로 불법으로 보고 있다.

판사: 위안부가 불법제도라는 건 피고와 검사 다 인정하는 부분. 그런데 검찰은 지금 위안부가 합법제도가 아닌데 그 제도에 위안부를 편입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변호인: 합법인지 불법인지가 왜 문제되는 지 이해되지 않는다.
책에는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라는 이미지를 우리가 부정해온 것 역시 그런 욕망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쿠마라와스미 보고서에 보면, (1)이미 매춘부였으며 자발적으로 일하고자 하는 여성과 소녀, (2)식당이나 군인을 위해 요리하고 빨래하는 보수 좋은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속임수에 속아서 온 여성들, (3)대규모의 강제적 폭력적인 여성 납치, 이렇게 다양한 경우가 있다고 쓰고 있다.
위안부의 이미지를 부정해왔다는 문장은 다양하게 해석 가능하다. 무엇보다 이 부분은 분명한 인용이다. (일본우익들이) ‘그들이 주장하는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 라는 이미지. 그리고 우리가 자발적 매춘부라는 이미지를 부정해왔다는 건 명시적 사실일 수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문장을 오로지 “피고인이 자발적 매춘부라고 주장했다.”라고 하는 것이야말로 자의적이다. 이런 식으로라면 쿠마라스와미, 맥두걸, 고소보충서, 더 나아가 각종 위원회가 발간한 책자들, 위안부 할머니 증언서, 이런 것들을 전부 부분 발췌해서 당신의 취지는 매춘 강조에 있지 않느냐면서 명예훼손 걸 수 있다.

검사: 이게 인용이라는 증거가 있는가? 각주도 없다. 인용했으면 어디서 인용했다고 써야 한다. 그리고 이 책에 그렇게 안 쓰였지만 다른 인용은 괄호 안에 문헌 이름과 쪽수가 쓰여 있다. 검찰 혼자 이 책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게 아니다. 이 책이 나온 이후 많은 역사학자와 연구자들이 머리 맞대고 토론해서 나온 책이 있는데 보았나?

박유하: 이 부분은 총정리하는 부분이다. 즉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을 되짚은 것이고 앞 부분에 나오는 ‘자발성의 구조’ 라는 절의 내용을 반추한 부분이다. 말하자면 그 부분내용을 총체적으로 가져온 부분이기 때문에 따옴표를 친 것이다. 문헌 인용은 앞부분에 있다.
명예훼손이 되려면 대상이 특정되어야 하는데 검찰은 목소리를 낸 사람들 숫자가 적어서 특정된다면서 여가부에 올려져 있는 자료에 생존위안부할머니들 이름이 나와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하지만 그 분들 중에는 가명을 사용한 분들도 계시다. 지원단체가 낸 증언집도 마찬가지다. 즉 특정되지 않는다.
정대협이 재작년인가에 서울시에 위안부문제관련 대학생이벤트를 신청하면서 만든 포스터에는 <20만명의 조선 소녀들 끌려가서 2만여명이 학살당하고 2백수십명만 돌아왔다>고 쓰여 있다. 나는 위안부경험을 한 조선인 전체를 대상으로 책을 썼다. 특히 가장 감정적으로 이입한 건 전쟁터에서 죽어간 분들이었다. 생존해서 목소리 낸 사람만 피해자일 수 없고, 지원단체의 주장에 따르면 20만명이나 되는데, 책에 나오는 케이스를 어떻게 누군가의 것으로 특정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작년에 일본에서 <일본군위안부>라는 책이 나왔다. 부제목은 <애국심과 인신매매>다. 지은이는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위안부문제해결을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온 지원단체다. 일본인위안부문제는 그동안 묻혀져 있었는데 뒤늦게 문제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부제목에 있는 것처럼 위안부란 ‘인신매매와 애국’의 틀이 중심이었다는 사실이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표지에는 ‘매춘부는 피해자가 아닌가’라고도 쓰여 있다. 바로 이것이 나의 문제의식이기도 했다. 검찰은 ‘매춘부’라는 말에 비난을 담아 말한다. 나의 책에서 그 단어는 인용일 뿐이지만, 무엇보다 검찰이 말하는 그런 의미로는 ‘매춘부’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강제성에 관해서도, ‘공적으로는’ 없었다고 쓴 취지는, 일본군이 위안소를 만들고 관리하기도 했지만 납치나 속임수까지 써서 데려오라는 것이 일본의 공식방침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너무 어린 사람은 업자를 다그쳐 돌려 보냈다는 증언이 존재한다. 다른 곳에 취직시키기도 했다는 자료도 있다. 그 경우 업자를 처벌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지만, 업자에게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고 적혀 있지도 않고, 위안부의 실질적 주인은 돈을 주고 사 온 업자였으니 제재에도 한계가 있었을 수 있다. 식민지나 본토의 유괴현장을 단속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묵인도 포함해 책임을 물었다. 내가 강조한 것은 ‘일본군에 의한 물리적 강제연행’이 결코 위안부동원의 중심모습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검사: 21세 이하는 중국 등지로의 이동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단속을 일본 본토에서만 적용했고 식민지에선 아니었다. 많은 학자들이 이 책을 비판했다.

박유하: 통첩문이 식민지에서 발견되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없다. 실제로 식민지 경찰도 유괴 등을 단속했다. 그런 자료는 강제성을 주장하는 일본학자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25년 전에 위안부 할머니를 만났고 10년 전에 위안부문제에 대해 책을 썼다. 검사는 짧은 시간에 많은 공부를 한 것 같지만 모르는 일이 여전히 많다. 그런데도 기존 연구와 지원단체 말만 믿는 이유가 무엇인가? 많은 학자들이 이 책을 비판했다고 말하지만, 대부분은 위안부연구자가 아니다. 즉 실제 자료에 접한 이들이 아니다. 나를 위해 증인으로 나오겠다는 역사학자도 없지 않지만 서로 증인을 채택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부탁하지 않았을 뿐이다.

검사: 피고인은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 따옴표가 인용 표시라고 했지만, 그 부분의 따옴표는 작은 따옴표다. 피고인은 다른 인용은 큰 따옴표를 썼다. 그러니 인용이 아니라 강조다.

판사: 작은 따옴표는 인용할 때도 쓰고 강조할 때도 쓴다. 검찰은 인용이 아니라고 하고 피고는 인용이라고 한다. 서로 견해차이가 있으니 판단에 맡길 문제인 것 같다.

변호인: 그러면 증거자료에 대해 설명하겠다. 우선 증거 1호, <마리아의 찬가>. 일본인 위안부가 쓴 수기다. 일본인도 인신매매 틀 안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제출했다. “2500엔 빌려주어 그걸로 가구라자카의 빚을 갚고 700엔을 아버지에게 드리고 대만으로 건너갔다.”고 쓰여 있다.
또 하나의 자료는 같은 책에서 발췌한 것인데, 일본인 여성도 하루에 수많은 군인을 상대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피고인이 ‘위안부의 고통이 일본인 창기와 다르지 않다’고 쓴 부분에 대한 보충 설명자료다. “한 여자에게 10명이고 15명이고 달려드는 모습이란 마치 짐승과 짐승간의 싸움 같았다.”고 쓰여 있다.

검사: 증거 1호는 일본인 위안부에 대한 내용이니 이 사건 공소사실과 무관하다. 마리아 찬가 발간일이 1971년도다. 91년 8월 김학순할머니 진술 이후에 대해 쓰여진 것이 제국의 위안부다. 공소사실과 무관하다.

판사: ‘일본인창기’라는 말에 관계되는 부분이니 무방하다.

변호인: 증거 2.< 빨간 기와집>. 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국인 여성이야기다. 식민지에서 배로 떠날 때 일본인 여성이 2명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한반도에 살던 일본인 여성도 위안부로 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제출했다. 식민지라고 해도 <일본제국>의 국민이 되어 있는 이상 군인이 강제로 끌어갈 수 있는 구조는 아니었다.

검사: 일본 매춘부는 성병 감염자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인 여성이 많이 끌려갔다. 일본 창기 일부는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갔다. 그걸 나타내기 위한 책이다.

박유하: (일본인 여성도 가난한 집 소녀들이 조선으로 팔려 오기도 했다. 그들도 위안부로 갔다. 그런 이들의 존재가 간과되고 있다. 조선인 소녀들도 물론 많았지만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여성도 있었다. 식민지는 순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만든 생각이다. 당시 조선사회는 성병이 만연해 심각한 문제가 되기도 했다.)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 위안부는 대우에 차이가 있었고 직접 차별받기도 했지만, 가부장제 하의 가난한 여성으로서 동원된 구조는 다르지 않다.

판사: 피고인은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면 말하지 말라. 변론은 원칙적으로 변호인이 해야 한다.

변호인: 증거3호 1, 2, 3은 위안부동원이 주로 인신매매로 이루어졌고 후반에는 14세이상 40세까지 400만명이 국가를 위한 근로봉사대 등 다양한 이름으로 총동원체제에 동원되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다. 이때 유곽의 창기까지 애국청년단등의 이름으로 애국을 강요당했다.
직업소개소가 속여서 보낸 정황, 그런 직업소개소를 경찰이 단속한 상황, 허가를 강화하려는 상황 등을 볼 수 있다. 식민지의 일본인 여성도 함께 했고, ‘병원선’에서 일해야 했던 정황도 나온다.
3-3은, 당시 사람들이 ‘만주’를 꿈의 땅으로 생각하고 이주하려 했음을 알 수 있는 자료다. 그런 틀 속에서 업자들이 인신매매등으로 여성들을 모아 데려간 것이었다. 물론 의뢰를 받은 경우도 있지만, 받기 전부터 움직인 사람들은 있다.
당시도 사기 등으로 이루어진 인신매매는 처벌받았다. 피고인은 그러한 정황도 전쟁을 일으켜 식민지의 가난한 여성들이 전쟁터로 동원된 것을 식민지화의 결과로 보고 구조적강제성이라고 말했다. 업자에 대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한 것은 당시도 사기에 의한 인신매매는 불법이었고 처벌받았기 때문이다. 군의 개입 자체는 충분히 서술했다.
4호증은 배춘희할머니의 영상 녹취록이다. 에프런을 두르고 군인들을 위해 천인침을 받았으며 위안부는 ‘군인을 돌보는 존재’라고 했다.
5호증 <들리나요>에도, 마찬가지로 물리적 납치 주체가 일본군이 아니고 유괴범들이라는 사실이 다수 적혀 있다. 부모를 위해 몰래 가거나 소개업자를 통해서 간 케이스도 많다. 소개소가 세탁을 한다고 거짓말을 한 경우도 나와 있다.

검사: 인신매매로 와도 묵인하고 넘어간 경우가 많았다.

판사: 일본군이 인신매매임을 알면서 묵인했다는 건지, 아니면 몰랐는데 아무튼 위안부가 필요했기에 받았다는 건지?

변호인: <제국의 위안부>에는 일본군이 묵인했으며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판사: 결국 헌병이 와서 직접 잡아간 게 아니니까 물리적 강제가 없었다는 것이고, 묵인하는 것에 대해서는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면 되나? (피고인을 바라봄)

박유하: 그렇다. 하지만 부대마다 어떻게 처우했는지는 다를 수 있고 다양한 케이스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군이 관리했다는 것은 업자를 통해 부대로 왔을 때 업자가 계약서를 부모에게 받았는지 확인하는 게 원칙이었다는 이야기다. 속았다면서 우는 경우에 다른 곳에 취직시킨 경우가 있고, 나이가 너무 어리면 돌려 보낸 경우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부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전부 돌려 보냈을거라고는 말하지 못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은, 공식적인 규율은 업자로 하여금 계약서를 확인토록 했다는 사실이다.

판사: 20만명의 위안부가 있다. 8만인지 20만인지 몰라도 그 경우는 원칙대로 안 된 경우인데, 원칙이 안 지켜진 경우가 더 많은지 확인되는가?

박유하: 그건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안 지켜진 경우가 많다 해도 그 이유는 대부분 업자들이나 다른 주변인들에게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변호인: <빼앗긴 청춘, 돌아오지 않는 원혼>이라는 증언집에는 “3~40대 가량 보이는 남자가 오더니 배불리 먹을 것을 주고 좋은 신발도 주는 곳을 알아봐 준다고 따라오라 했다.”고 쓰여 있다. 가 봤더니 여관에 농민의 딸들 14~15명 있었다고 한다. 무엇 때문에 어디로 끌려가는지 모르고. 자물쇠로 잠겨있어 도망도 못해. 현장에 도착했더니 카키색 군복입고 각반을 찬 일본군 3명이 기다렸고 중국 상해역으로 갔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다. 농민의 딸들,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을 대상으로 위안부 모집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검사: 이 이야기는 오히려 강제로 위안부가 모집이 됐고, 군인이 모집 과정에 가담했다고 봐야 한다. 강제동원, 강제연행의 주체는 일본군이다. 그게 역사적 사실이다. 근데 이 사건 도서에서는 강제동원, 연행의 주체가 결코 일본군이 아니라고 서술하고 있다.

변호인: 물리적 주체가 일본군이라는 건가?

검사: 물리적, 구조적 주체 모두 일본군이다.

판사: 공소사실보면 일본군이나 국가가 강제연행을 지시했다고 볼 증거는 없다는 입장이다. 업자가 어떻게 데려왔든 이걸 묵인한 것에 대한 책임은 있을지라도… 일본국이 강제 연행이라고 끌고 갔다는 증거가 없다고 말했으니.

변호인: 증 7호-1-3. 이하는 <강제로 끌려간 일본군 위안부들>이라고 하는 정대협이 만든 증언집이다. 위안부가 국방부인회에 가입해서 협력을 강요당한 정황이 나온다. 어깨띠를 걸고 모자 쓰고 병사를 배웅하기도 하고 훈련을 받기도 했다. 황국신민서사를 외워야 했고 기미가요를 부르고 방공연습도 했고 간호활동도 했다. “안에 들어가 계급 높은 사람 만났다. 조선에 가고 싶다 말했다. 간호원이 부족하니 가겠냐고 물었다. 간호원은 3층에서 잤다.” 성노동 이외에 전쟁 협력을 강요받았다는 이야기이고, 강요된 애국, 강요된 협력에 대한 증언자료다.

검사: 이 증언집에 조선으로 보내줬다는 게 나온다. 그런데 떠나기 전 새로운 조선인 여자가 보충돼 왔다는 내용이 있다.
동원양상에는 일본인이 데려간 경우도 많다. 9-3에는 총검을 들이대고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을 외쳤고 강제로 트럭에 실려 끌려갔다고 나온다. 이는 직접적으로 강제로 끌고 갔다는 걸 말한다. (여복실의 경우)

변호인: 피고인은 책에 “군인이나 헌병에게 끌려간 경우도 있다.”고 명시했다. 다만 그 경우는 개인적 일탈로 봐야한다고 했을 뿐이다.

박유하: 현재 학계의 이해는, 점령지에선 강제연행도 있을 수 있으나 식민지에서는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이 중심적이다. 학계나 관계자라면 다 아는 이야기가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한 이야기는 일본군이 모집과 관리는 했지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데려오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의미다. 물론 군인이 강제로 데려갔을 경우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지만 그 경우는 개인적 일탈이라고 해야 한다. 식민지라 하더라도 표면적으로는 국민의 한사람이니 강제로 끌어가는 건 불법이기 때문이다. 군인이라고 말하는 경우는 많지는 않고 그 경우도 군복을 입은 업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보충-물론 진짜 군인이 함께 왔을 수 있으나 그 경우 오히려 더 형식적으로는 자원의 형태를 띈 듯한 정황이 <여자의 병기>에 보인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통치 방식이다.)

판사: 업자가 군복을 입었을 수도 있다. 개인의 일탈일수도 있다. 업자가 군복을 입었다는 사료가 있나?

박유하: 업자가 군복을 입었던 것으로 보이는 자료들이 있다. 추후 제출하겠다.

(하단에 재판정에서 말하지 못한 추가 내용을 덧붙인다 이하에서는 “박유하 보충”으로 표시: 7-4에는 위문단에 참가해서 간 여성의 증언이 나온다. 그런데 그 위문단 중에는 일본인 여성도 있었다고 나온다. 이 역시 한반도에서 강제연행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었다는 증거다
8호증은 요금표 등 위안소규칙들이다. 부상병을 돌보고 빨래하고 전쟁터로 배웅한 이야기가 나오고 병원에 입원한 위안부를 군인이 문병 온 이야기도 있다. 9-1에는 위안부생활이후 군수공장을 한 여성 이야기도 나오고, 그 행위를 이적행위로 인식해 그런 경험은 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9-2에는 조선에서 떠난 일본인 여성 이야기가 나오고, 9-3/4에도 위안소의 또다른 정황들이 나타난다.)

변호인: 10호증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4>에는 “나라를 위해서 나갔다.”는 증언이 나온다. 그러니까 보상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조선이 가난에 빠져서 돈벌러’가야 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검사: ‘나라를 위해서’라는 말은 일본제국을 위해서라는 뜻이 아니다. 당시는 나라를 못 세워놨으니까 ..

변호인: 11호증도 같은 증언집 5권이다. 위안소의 정황을 알 수 있다.

검사: 증언집에 오히려 명쾌하게 정리 돼 있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 군위안소 유형으로는 군직영위안소, 군전용위안소 및 일반위안소 중 군도 이용하는 위안소 세 가지다. 군 직영, 형식상 민간업자가 경영하나 군이 관리통제하는 위안소, 셋째는 군이 지정한 위안소. 이 요시미 교수의 정의는 아주 적절하다. ‘형식상 민간업자가 경영하나 군이 관리통제하는 군인군속전용의 위안소였다.

(박유하 보충: 12호는 <해남도로 연행된 조선인 성노예에 대한 진상조사> 는 정부산하 위원회가 만든 것이고 조선인 일본군의 증언이 수록되어 있다. 조선인 위안부 나이가 군인들보다 많아서 누님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대부분 일본여성이었다거나 일본여성이 조선인보다 젊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러한 이야기는 일부분의 이야기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이야기들이 무시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장소와 시간에 따라 수많은 다른 경우들이 있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13호증은 <일본군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라는 책이다. 위안소경영에 위안부의 ‘작부허가서’, ‘취업허가서’, ‘폐업허가서’등이 필요했고 그 서류를 군대에 보고해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안소 업자들은 같이 조합을 만들기도 했고 업자가 위안부를 대신해서 조선에 송금했다.
이동의 자유가 있었고, ’여자청년대’로서 응급처치법을 배우는 등 협력강요정황도 나온다.)

변호인: 14호증은 조선인 일본군이 쓴 책이다. 위안소에 대한 내용인데, 번역한 부분을 보면 위안소이름이 ‘애국봉사관’이었다. 일본군이 위안소의기능을 군인 전투력 향상을 돕는 것으로 ‘애국’하는 곳으로 생각했다는 증거다.
15호증은 일제시대 작가 최명익이 쓴 <장삼이사>라는 단편이다. 소설이지만 조선인 업자가 주체적으로 일본군인을 따라다니면서 위안소를 운영했음을 알 수 있다. 자발적인 것은 업자였다.

검사: ‘애국’은 공소사실 중 하나다. 위안부가 애국적 동지적 관계였다, 나라를 위해 기꺼이 했다, 띠를 둘렀다… 이런 서술을 하고 있는데 이건 모두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 위안부의 내면에 대한 기술이다. 아무런 근거없이, 이 사건 도서에서는 조선인과 계속 등치시키고 있다. 유곽여자들이 하찮은 존재로 자신을 인식했는데 국가를 위해 봉사한다는 자긍심을 갖게 했다는 이야기다. 이 사건 도서에서는 아무런 근거없이 등치시키면서 위안부가 위안부와 동지적 관계였다고 적시하고 있다.

변호인: 그 부분이 일본인 위안부 경우라는 것은 피고인 자신이 책에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앞에 조선인위안부가 빨래하고 간호했다는 증언을 인용했고, 그래서 “조선인 위안부도 기본적인 관계는 같다고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패전 전후 위안부가 부상병 간호하고 빨래, 바느질했던 배경을 이해할 수 없다. 조선인 위안부들도 사유리 등으로 불렸다. 대체 ‘일본인’이 되는 일…” 이 부분은 조선인 위안부에 부여된 역할이 일본 위안부와 같다는 걸 말하고 있다. “‘거짓 애국’ 과 ‘위안’에 몰두하는 게 그녀들에게 하나의 선택일 수 있었다.”고 쓴 것이다.
구조적으로는 일본인위안부와 같은 처지에 놓였지만 일본인 위안부와 다르다는 것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박유하 보충: 16호는 국방부인회에 대한 책이다. 위안부들이 왜 에프론을 입고 띠를 두르고 ‘애국’적인 행동을 해야 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자료다. 이른바 창기들도 ‘우리도 일본여자’, ‘나라를 위해’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동원에 적극 나서도록 만든 것은, 사회의 매춘에 대한 차별이었다. 조선인 위안부도 그 틀에 포섭된 것이다.
17호는 동시대 위안부모집광고다. 소개소가 18-30세 여성을 모집한 것을 알 수 있다. 신문에 이런 광고가 났다는 것은 위안부라는 존재가 공적인 존재였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하는 일을 명시하지 않고 있고 이러한 점이 사기모집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변호인: 증 18호는. 위안소 입구 사진인데, <몸과 마음을 바치는 일본 여성의 서비스>라고 입구에 씌여 있다. 다른 하나는 위안소 이름이 <고향>이거나 <애국 식당>이다. 이는 위안소에게 요구된 역할이 신체적/정신적 위안이었음을 말한다.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기 위한.

검사: 조선인위안부는 동지적 관계가 아닌데 동지적 관계로 허위사실을 표현했다는 사실을 두고 기소한 것이다.

변호인: 피고인은 조선인위안부를 자발적인 동지적 관계라고 하지 않았다.
19호증은 당시 일본군인이 위안부는 ‘군속’이었다고 쓴 자료다.

검사: 그건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것 아닌가. 공소사실과는 관련이 없다.

변호인: 20호증이다.
<여자의 병기>라는 조선인 위안부의 수기다. 모집되어 강간당하고 울지만 나중에는 국방부인회에 가입하여 기뻤다고 하고 애국봉사단이 되어 일반창기와는 다르다고 자신을 인식한다. 그런 식으로 변해갔던 경우도 있다.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서일 것이다.
21호증은 일본인 위안부 경우지만, 많은 군인을 상대한 데 따른 고통이 나타나 있다.
22호증은 일본군군의가 쓴 <한구위안소>. 게이코(조선인 위안부)에게 사령관이 표창했다는 내용도 있다. 군인이 업자의 착취에서 보호하려 했던 내용도 나온다. 이 책에 나오는 위안소 이름도 ‘평화관’이다. 위안부가 사모님 취급을 받은 이야기도 나온다.
앞서 말한, 사기를 당해서 왔는데 다른 곳에 취직시킨 정황은 이 자료에 나온다.
23호는 금년 6월에 마이니치신문에 발표된 자료다. 미군의 포로를 심문한 자료이고 조선인이(군속일 가능성이 높다) 증언한 부분이다. 포로들에게 일본의 식민지통치 전반에 대한 생각을 물어 본 자료인데, 이 중에 위안부관련 언급이 나온다. 이들이 “한국 매춘여성 모두는 자원자였거나 또는 부모에 의해 매춘업에 팔려온 여성들이었다. 일본인에 의한 강제적 징발이 있었다면 남자들이 격분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쓰여 있다.

검사: 이 보고서에 군속이라고 나온다. 민간인 이박도, 백승규, 강기남 이렇게. 위안소를 경영한 업자들로 추정된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여기 에 끌고 온, 협조한 사람들은 처벌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원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내가 강제로 데려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온 것이라고 말하려고 이렇게 증언을 한 거다. 따라서 이 증언은 신빙성이 낮아 위안부 자발성을 뒷받침하는 진술로는 보기 어렵다

변호인: 검사의 추측만으로 이 자료가 신빙성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판사: 이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한 내용이 신빙성 있느냐. 이건 좀 봐야 할 문제다.

변호인: 24호증은 70년 8월14일자 서울신문 기사다. ‘화류계 여성을 동원하던 일제는 점차 인원이 달리자 일반처녀들까지 소집’이라고 서술했다.
25호는 센다가코 인터뷰 내용이다. “일종의 매춘부였다.”고 하면서 “그녀들 스스로가 그것은 나라를 위해서라고 믿고 있었다.”고 말한다. <종군위안부>라는 책에도 같은 인식이 나타나 있다.

검사: <종군위안부>라는 책에는, 일본인 위안부에게는 ‘조국을 위하여’,’군인을 위하여’ 라는 의식이 있었고 자신의 행위를 애국심이라는 설탕으로 장식했다. 그러나 조선인은 강제연행되서 위안부로 일했던 여성들이다. 조선인과 일본인 위안부를 다르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 사건 도서에서는 일본인과 조선인을 등치시켜서 같다고 말해 동지적 관계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판사: 강제연행이란 구조적 강제성이라는 얘기가 없을 때 아닌가. 물리적 강제성을 말하는 것일텐데.

변호인: 강제라고 해도 업자에 의한건지, 군에 의한 건지를 구별해야 한다. (동의함)
27호는 한국정부보고서다. 외교부 정신대문제실무대책반이 1992년 7월에 낸 것이다.
여기서도 군이 위안소 직접 경영하기 보다는 경영은 매춘업자에게 맡기고 군은 위탁 관리 등을 한 게 일반적이라는 인식이다. 모집 방법도 38년까지는 도시지역 여공모집, 식당종업원 등 인신매매 수법이고 38년~40년까진 빈곤 농부의 딸들을 모집했다고 쓰여 있다.
위안부에게 수입이 있었고 업자와 나누었다는 것 등 관리매춘형태임을 알고 있었다.

검사: 이 보고서는 일본군이 목적을 위해 군대를 위한 매춘업을 했고 군대가 직접 전면적으로 개입하여 철저하게 관리할 수 있도록 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군대에 종속된 집단이었다. 매춘업이라는 단어를 보고, 한국 정부도 매춘업이라고 인식했다고 입증취지로 제시했지만 한국 정부가 위안부를 매춘업으로 인식한 게 아니다. 보고서를 보면 일본군 시각에서 볼때 군대에 의한 강간 예방하고 성병 예방하는 등. 이를 위해 매춘업에 군대가 개입해서 철저하게 관리하도록 했다는 내용이 위안부 연구 초기 시점이고 그래서 제목도 중간보고서다. 한국정부는 위안부를 매춘으로 인식한 적이 없다.

변호인: 이 당시 한국정부는 위안부를 관리매춘으로 인식했다. 그리고 그에 근거해 고노담화가 작성되었다.
28호 증4에는 각 대장에게 내리는 지시가 있다. 이 부분에는 ‘정신적 위안’에 대해 쓰여 있다. “현재 특수위안소는 위안부 수가 적어 단지 정욕 채우는데 불과하니 좀더 수를 늘려서 정신적 위안도 주도록 지도해라.”고. 신체적 성욕 뿐 아니라 정신적 위안도 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위안부의 역할이었다는, 강요된 역할이라는 증거자료로 제출한다.

검사: 오히려, 계획적으로 위안부가 운영됐다는 걸 보여준다. 자료 29에서 33은(<종군위안부 관계 자료집성>)은 아시아여성기금에서 펴낸 자료이다.

(박유하 보충: 이 자료들에는 계약서,영업허가서,취직허가서등이 나와 있다. 허가제라는 것은,미성년을 고용하거나 사기 등으로 데려온 사람이 없도록 하는 취지였다.
군인이 폭행도 많이 했지만 헌병이 단속했다. 말하자면 폭행은 있었지만 공적으로 허용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유곽을 위안소로 지정한 정황도 나온다. 군속에게 제복을 착용하도록 한 정황도 보인다. 군속취급을 받은 업자에게도 군복이 지급되었으니 위안부가 군인이라고 착각했을 수도 있다. 위안부는 처음엔 동향사람이 모집되었다. 그 쪽이 더 정신적위안에 안성맞춤일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위안단중에 일본인이 90명 있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변호인: 다음은 위안부 문제해결 방안 연구 ‘여가부 용역 보고서.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낸 보고서. 연구책임자는 민디 코틀러(아시아정책연구소) 다. 이 사람은 미국하원결의를 이끌어내는데 공헌한 사람인데도, 위안부모집은 인신매매를 통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검사: 인신매매에서 매매주체는, 대상자가 아니고 ‘대상자를 강제 또는 기망에 의해 취득한 사람과 그 사람으로부터 대상자를 사려는 사람’이다. 대상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몸을 팔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변호인: 이것은 단순강제연행이 아니라 부모등에 의해 팔려가는 등 형태였다는 말을 하기 위한 자료다

검사: 그럼 부모들이 아이가 위안부 일 한다는 걸 알고 팔았겠느냐. 인신매매 대상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팔았다는 거냐?

변호인: <제국의 위안부>는 속아서 간 경우도 스스로 간 경우도 모두 있다고 한다.
36호증은 2015년에 미국의 일본(역사)학자들이 내놓은 성명서다. 2015년 위안부 할머님들을 위하는 입장에서 나온 보고서다. 성폭력과 인신매매 없는 세계 만들기 위해, 아시아의 평화와 우호를 촉진시키기 위해 과거 잘못을 청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위안부 문제는 인신매매라고 인식하고 있다.

검사: 위안부는 군대에 의한 조직적 관리가 행해졌다는 점에서, 그리고 일본 식민지와 점령지에서 가난하고 약한 여성들을 착취했다는 점에서 문제다. 여성의 이송과 위안소 관리에 대한 일본군 관여를 밝히는 자료가 상당수 발굴됐다. 피해자들 증언에도 중요한 증거가 포함되어 있다. 증언들 차이가 나는 점이 있을지라도 전체로서 호소력 있고 공문서로 입증되고 있다. 증거도 존재하지 않고 증언은 일관성 없어 보이지만 전체적 증언은 분명 한 곳으로 향하고 있다.

변호인: (피고인은 그 부분에 대해 의견이 다르지않다.) 위안부와 공창제도에 관한 학자들의 연구도 많다. 일부를 읽겠다. “폐업신고는 폐업신고서를 내야 하는데 그 서류에는 주인업자들이 연명날인을 하도록 돼 있었다. 업자들이 자신들 이익에 반해 창기의 자발적 폐업을 인정할 리가 없었다.”, “군인의 성욕 처리와 성병 예방을 위해 공창을 설치했다.”…등

검사: 증거 38~41호가 공소사실과 무슨 관계가 있나. 위안부가 공창제와의 관계가 무슨 관계가 있나?

변호인: 위안부는 공창제도에 편입된 것이라고 여기에 기재되어 있다. 그러니 명예훼손이 아니라는 증거제출이다.

검사: 모집 장소는 일본 내지다. 차마 군에서 직접 손 댈 수 없는 일이어서 생각해 낸 것이 위안소다. 군속으로 되어 있지만 정식 군 소속이 아니며 내부에서 ‘어용 상인’으로 여겨지는 이시바시 도꾸다로오 같은 존재를 이용했다.

변호인: 인용한 부분은 필요성에 의해 인용했을 뿐이다. 동지적 관계라는 틀 안에서 물건 취급을 받는 것으로 명시적으로 말했고, 말 그대로의 네덜란드, 중국인 위안부 등 전쟁상대국 여성들과 비교되는 개념으로 쓰고 있을 뿐이다.

검사: 연합뉴스 자료 보겠다. 정대협 조치 제안이 2015년 4월23일 나왔다. 군 위안부문제 해결 시민단체와 김복동이 23일 도쿄에서 제시한 방안이다….(생략) 피고인은 책임을 인정한다고 하는데 법적책임이 아닌 무슨 책임을 인정한다는 말인가.

변호인: 그런 것을 왜 문제삼아야 하는가. 하지만 정대협도 법적 책임에 관한 허들을 낮췄다고 표현한 바 있다. 법적 책임을 요구사항에 명시적으로 포함하지 않았던 것이다.

판사: 일본국에 법적 책임이 있느냐 아니냐는 쟁점과 상관이 없다.

박유하 :간단히 보충하겠다.
1) 일본인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를 동일시한다고 하는데 차이에 관해서도 썼다. 장교를 상대하면 인원이적으니 환경과 입장이 더 편할 수는 있다. 하지만 조선인 위안부도 장교를 상대한 경우가 없지 않았다.
조선인 위안부들 중에 일본인처럼 행동한 이들이 있는 건 오히려 이중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 창부조차, 일반여성처럼 ‘동등한 일본여성’ 취급을 받기 위해 국방부인회에 적극 가입하고 군인을 전송한다든지 하면서 사기를 드높이기 위한 행동을 했다.

2) 한반도에서도 일본인 여성들이 위안부로 나갔다. 위안단에도 섞여 있었다. 한반도에서 일본인여성이 나가는데 조선인만 따로 강제연행하는 일은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힘들다. 당시에 갑자기 연행된 것은 주로 반체제 사상범들이었다. 전쟁터와 식민지의 차이를 봐야 한다.
검사는 안병직교수가 ‘위안단’ 모집을 강제라고 말했다고 했지만, 그 안에 일본인 여성도 많았다는 사실을 간과한 인식이다. 그들도 하루에 수십명 상대하기도 했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었겠지만 여성으로서 동원되어 당한 고통의 질은 같다.

3) 군복지급에 관한 지적이 위안소출입뿐이라고 검사가 말했는데, 한반도로 업자가 모집하러 왔을 때 군복을 입은 것으로 보이는 자료가 있다. 추가로 제출하겠다.

4) 위안소로 가는 걸 알고도 딸을 일부러 판 부모가 있겠느냐 했는데 그런 부모도 적지 않았다. 단 수양딸인 경우도 많았다. 가난에 따른 제도의 희생양이 된 케이스가 많은 것으로 본다.

<중국으로 끌려간 위안부 2>의 일부를 읽어 보겠다

“ 그때가 뭐 열몇살인지 몇인지. 아, 열여섯살 났을 거요. 술집에도 한 2년 있었으니까는.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도장 받아오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도장을 찍어 주겠나.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내 말이라면 또 믿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데리고 손을 잡고 도랑카에 나가서 사정을 했지요. “아바이 나, 누가 색시 사러 왔는데, 얼마얼마 주겠다는데, 내가 먼 데로 가서 돈 벌러 가갔소.” “여, 그럭하면 어떠카갔니? 내가 너 하나 보고 사는데 안된다.” “안될 일 없다구. 아버지 잘 사는 걸 보구 죽어야지.우리 아버지 돈 쓰고 그저 잡숫고 싶은 거 잡숫구, 나 하나 없는줄 알고 아버지, 나 소개해 주소. 어떡하갔어. 술집에 빠져서 2년동안 돌아 먹었는데 나 촌에 안 있갔시오.” “정 그렇다면 내가 소개해주지.” “그래 어머니 아버지 이름 다 쓰고 도장 다 찍고” “근데 할머니 할아버지 도장 다 찍으랍니다. 어카갔나? 아버지” “그럼 내가 쓰지” 아버지가 써가지구 할머니 도장 할아버지 도장 찍어서 그 다음에 다 동의를 받았수다. 그래가지구 박천으로 올라갔죠 올라가니까네 보더니 우리 아버지 하는 말이 “당신에게 내 딸을 팔았으니까는 다른 데 못넘긴다.” 그렇게 약속을 했단 말요.”

이런 이들은 적지 않았고,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이다.

판사: 중요한 자료같다. 왜 제출하지 않았는가? 제출하라.

박유하: 검사의 질책을 들으면서 제출필요성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자료는 너무나 많다.

5)허가 신청서를 업주 측 서류라고 검사는 말하지만 ‘작부’(당시는 위안부를 작부라고 부르기도 했다)로 본인들의 허가원도 필요했다. 또 센다가코를 인용한 것을 부정적으로 말하는데, 센다를 책에서 앞부분에 인용한 건 ‘애국’ 의 틀에서 이 문제를 본 저자가 내가 아는 한 센다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10년전에 같은 인식을 가졌지만 그 때는 읽지 않았었고 나중에 봤기 때문에 앞선 인식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인용한 것이다.

6) 검사는 위안부가 군속이어도 성노예다, 라고 말한다. 그런데 일본 국회에서 논의된 자료에 대해 쓴 글을 보면, 일본 위안부들이 전투자로 인식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수류탄 나르거나 빨래 하거나 한 것에 대해서다. 보상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추후 제출하겠다.

7) 18번 연합군 자료를 신빙성이 없다고 하는데, 그 발언의 앞뒤는 일제의 가혹함에 대해 쓰고 있다. 그러니 그 부분만 검사가 원하는 뉘앙스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신빙성이 없을 이유가 없다. 더구나 세 발언자 중 한사람에 대한 개인조서가 있는데 탄광부였던 사람이다. 검사가 추측하는 ‘책임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업자’가 아니다. 일제의 가혹함에 대한 비판을 전체적으로 말하고 있는 사람이 위안부 관련 사항만 다르게 말할 이유는 없다. 추후 제출하겠다.

8) 미국역사학자들도 위안부문제에 관해 나와 비슷한 인식을 내놓았다. 2015년 5월의 일이다. 내가 <제국의 위안부>에 이들의 성명을 수록한 이유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위안부문제에 대해 가장 양심적으로 보도해 온 아사히신문이 2014년 8월에 노예사냥을 했다던 요시다세이지 증언을 검증하고 허위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한국에는 그런 취지가 잘 보도되지 않았다.

9) ’동지적 관계’에 대해 다시 한 번 설명드린다. 우선은 형태적인 의미다. 그저 한국이 일본제국에 포섭되었으니 ‘일본’인으로서 동원되었다는 의미다.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은 위안부를 전쟁터에서 처녀들을 끌고 가 군인들이 강간한 것으로만 이해되어 왔기 때문이다. 식민지 통치 하에서의 국민동원의 일종으로 보아야 한다. 그랬을 때 실제로 얼마나 마음으로부터의 행위였는지 여부의 판단은 지극히 어려운 문제다.
그런 속에서 군인과 위안부가 사회 가장 최하층의 인간으로서 고향을 멀리 떠나온 사람들로서 감정적 교감을 할 수 있다. 형식적 틀은 민족적 관계지만, 실제관계는 남녀관계거나 계급적 관계다. 민족 관계로서의 동지적 관계일까봐 겁내고 부정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 정황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를 하나 더 읽어 보겠다.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라는 책이다. 작고한 분이다.

“ 나는 군인들의 기분을 나쁘게 하지 않게, 즐거워하도록 할 수 있는 한 노력했다. 병사들의 가족이나 고향 얘기를 들어주었고, 같이 일본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가정이 있는 병사들도 불쌍했다. 그 사람들은 늘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하는 것 같았고 그 중에는 울면서 이런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전장에 있는 군인들의 마음과 우리들의 마음은 결국 같았던 셈이다. 전쟁터에 온 이상은 아내도 아이들도 목숨도 버리고 천황을 위해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열심히 위로하고 그런 생각을 잊어 버릴 수 있도록 얘기해주곤 했다.”

이 분은 좋아하던 군인도 있었는데 그가 전쟁 끝나면 일본에 가자고 해서 자신은 조선으로 가야 한다고 했더니 그 군인이 “그렇다면 내가 조선으로 가지. 요시코가 일본인이 되어도 좋고, 내가 조선인이 되어도 좋아.”라고 했다고도 말한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번 야마다이치로가 찾아오는 걸 삶의 낙으로 여기며 나는 위안부 생활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또,

“ 그 칼은 천황 폐하로부터 받은 거잖아. 적에게 향할 것을, 왜 이렇게 험하고 먼 곳까지 당신들을 위안하러 온 나를 향해 겨누는 거야. 조센삐, 조센삐 하며 사람을 바보 취급하고. 우리들 조선인도 일본인이고, 일본인이 되었다고 그랬잖아.”
“ 세상이란 것이 정말 뒤집히는 경우가 실제로 있긴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입장이 바뀌면 인간관계도 변해 버린다. 그것이 또 다르게 나의 슬픔을 자아냈다. 그때까지 “일본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나라다. 일본인은 가장 우수한 인간이다.” 라고 했던 군인들이 나라가 전쟁에서 지자 순식간에 작아 져버렸다. 그건 너무 비참하지 않나 생각하자 또 눈물이 났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여전히 일본인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나는 타테8400부대의 군속이었다.”

판사: 그 두권의 책을 증거로 제출하라. 다음에는 피고인 심문 진행을 2~3시간 진행하겠다. 다음 기일에 피고인심문까지 하고 자료를 다음기일까지 받겠다. 최종변론은 3주후쯤 최종변론하고 결심하면 어떨까. 11월29일 오후 2시로 바꾸면 어떻겠느냐. 3주 후인 12월20일 화요일에 결심공판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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渦中日記 2015/3/14

며칠을 오에선생관련 일로 보냈다. 나로선,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을 잠시 잊고 싶었던 며칠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문학이 정치나 역사와 무관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우리의 하루하루가 정치(사회구조)와 무관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오에 선생 역시, 개인의 내면이 어떻게 사회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고, 때로 억압받게 되는지를 일관되게 써 왔다.
그리고 내게 오에선생의 작품은 초기의, 수재작가다운 명료하면서 건조한 작품들보다, 작가자신이 말하는 후기작품들을 통해 다가왔는데, <인생의 친척>,혹은 <새로운 사람아,눈을 떠라>등에서 받았던,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오래도록 선생의 작품을 읽게 만든 힘이기도 했다.

<인생의 친척>에서 선생은, 지적/신체적 장애아였던 두 아들이 자살한 후,슬픔과 절망을 견뎌내고 아름다운 종말을 맞이하는 한 여성을 그려내면서 “슬픔”을 “친척”같은 것이라 표현한다.
실제로 장애가 있는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인생이란 일반인들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것일 터이고, 설사 순간순간의 기쁨이 있다 해도, 그 기조가 가라앉은 슬픔일 것만은 분명한 일이다. 물론 나쁜 일이라는 의미에서의 슬픔이 아니라, 어떤 부조리와 불균형과 파괴의 의미를 매일처럼 “생각해야 하는” 슬픔.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선생의 자택에 초청받아 간 적이 있다. 나는 그 때 아들 히카리(光. 빛)씨에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존 엘리엇 가디너가 연주한 바흐 마태수난곡을 선물했다. 2012년 봄의 일이다. 오에 선생님께도 그 전에 에스페리온 20이 연주한, 역시 바흐의 the art of fugue 를 선물한 적이 있다.
근처 프랑스식당으로 식사하러 나갈 때, 선생은 현관에서 몸을 굽혀 아들이 신발을 잘 신을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그 때 나는 선생의 슬픔을, 목도했다고 느꼈다. 그건 단지 어떤 불편함도 아니고 번거로움도 아니고 그렇다고 도움이나 시혜가 동반하기 쉬운 어떤 감정도 아니고, 그저 인생의 무게, 같은 것이었다. 삶에 대해 경건해질 수 있고 인생에 겸허해 질 수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그러나 자주 잊어버려 인생을 한없이 가볍게 만드는.

사진은 2008년 1월. 아사히신문사에서 주는 오사라기지로논단상시상식에 오에선생도 와 주셨었다. 함께 찍은 이는 아사히신먼사 와카미야 주필. 작년에 내가 일본우익을 대변한다는 기사에 항의해 “나도 우익의 대변자라 부르라”는 칼럼을 동아일보에 썼던 이다. 그는 일본수상 야스쿠니참배를 반대하고 독도를 한국에 양보하라고 써서 일본우익들의 맹렬한 반발을 샀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그저 그가 “위안부강제연행에 대한 아사히의 과거기사가 군인의 말만 믿고 좀 많이 나갔다”고 말했다는 것만으로 아사히가 우경화했고 와카미야씨는 보수,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같은 편이 합리적이려고 하는 순간, 그들은 늘 윤리를 독점하려 한다.

실은 오에선생과 함께 보냈던 시공간에서조차 나에 대한 적의를 가진 이가 나타났었다. 그리고 오에선생과 나를 이간질하려 했다. 심지어 내게 오에선생초청을 의뢰했던 김대중도서관측 사람들과도. 그래서 사실은 여전히 편치만은 않았던 며칠이었다.

곳곳이 적의의 지뢰밭,이라고 느낀다. 이 한 달, 여러사람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견뎌왔지만, 다시 “인생의 친척”을 읽든지..해야 할 것 같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78948798798700&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5/2/28

결국 2월 마지막날은 나를 고발에 이르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언론사에 대한 실낱같은 기대가 깨지는 날이 되었다. 한겨레에 오늘 기사를 실은 길윤형기자에게 질문을 받고 대답했던 내용을 다시 올려둔다.

나는 이 대화에서 분명히 와다교수와도 의견이 같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런데도 같은 것으로 “추정”한다면서, 심지어 결국은 “일본우익의 주장을 수용”한다고 써 버렸다. 더구나 나는 한국이 요구하는 “법적”책임을 지우는 일이 왜 어려운지를 말했을 뿐인데 “책임”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뉴앙스의 기사가 되고 있다.

나는 분명히 일본의 책임을 물었고, 앞서 올린 와다교수의 말처럼, 일본에서 내 책을 높이 평가한 사람들은 우익이 아니라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 애써 왔던 사람들이다. 아사히신문이나 마이니치등 진보언론이 여러번 관심을 표했고, 우익/보수 성향의 산케이나 요미우리에겐 아직 무시당하고 있다. 그런 상황을 가장 잘 알 “일본특파원”이 그걸 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전한 것이 다름아닌 한겨레 신문이다.

나는 우익도 아니고 협력자로서의 친일파도 아니다. 아무나 “우익””친일파”딱지를 붙이는 일로 자신들의 목소리와 자리를 유지하려는 이들이 정치적으로는 나와 먼 곳에 있는 이들이 아니어서 그동안은 본격적으로 싸우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런 유보적 자세를 접으려 한다.

나의 목표는 일본우파까지 주목해 주는 것이다. 보수언론이 움직여야 아베정권도 움직일 수 있을 것이기에. 진보의 생각만으로 좌우가 공존하는 “일본공동체”를 움직일 수는 없다. 내가 90년대에 일본이 만든 아시아여성국민기금을 평가한 건, 그것이 불완전하나마 좌우합작형태의 “사죄와 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문제는 끝난 문제라고 일축했던 일본의 보수세력을 내 책이 혹 움직이는 일이 있게 되면, 오로지 자신들과 해결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비난해 온 이들은, 내 논지가 그들을 움직였다고 인정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말하고 싶은 내용을 내가 말했다고, 나는 일본우익의 나팔수였다고, 또다시 앵무새처럼 말할 것이다.

나를 할머니의 이름으로 고발하도록 만든 것은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국가를 동원해” 억누르려 한 한국지원단체다. 그리고 그들의 그런 행위를 뒷받침한 건, 일부 재일교포이고, 내 책이 일본우익의 상찬을 받았다는 거짓말을 쓴 한겨레신문이고, 고발이후에도 좌시했고 가처분판결이 나자 그 판결을 옹호했던 몇몇 지식인들이다. 학문을 국가의 힘을 빌어 단죄하는 일에 지식인마저 동참한 것이 2015년의 한국사회다.
한국사회의 위기와, 이들은 무관하지 않다.
할머니들을 죽이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그들이다. 오로지 자신들의 생각을 관철하기 위해서.

온갖 “해석”들이 나를 죽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이데올로기와 편견을 넘어 나의 문제제기를 왜곡과 곡해 없이 읽어 준 건 소수의 “열린” 사람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건 “강한”사람들이었다.
그런 이들, 열려있고 강한 또다른 이들이 책을 만날 수 있도록, 책을 역시 출판해야 할 것 같다.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68639513162962

渦中日記 2/25

한 언론의 기자가 기사를 쓰겠다면서 질문을 했다. 일본특파원이라 일본사정에 대해서도 위안부문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정치가나 일반인들과는 질문의 차원이 달라 성의껏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내가 위안부문제해결과 한일화해를 위해 쓴 건지 혹은 일본에 “법적책임이 없다”는 걸 주장하고 싶었던건지 알고 싶어했다. 나로서는 서글퍼지는 대답이었지만 말했다.
“결론부터 정하고 덤비지는 않습니다. 그럴 이유도 없고요. ”
한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뭔가 다른 의도를 담아 글을 쓰는 식으로 머리굴리는 부류의 사람을 싫어하고, 누군가의 지시에 쉽게 따를만큼 순종적이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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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논리적으로 정합적이지 않다. “보상”의 의미는?

이 책은 여러 “다른”오디엔스(독자/청중)를 대상으로 한 책이에요. 책에도 썼지만 원래는 일본을 향한 글만 쓰여질 예정이었구요. 일본이라 해도 지원자/정부/부정자,이렇게 세 부류입니다.
앞에서 하던 얘기와 뒤에서 한 얘기가 다르다,고 느껴지는 건 그 결과입니다. 예를 들면 한일협정에 관해서도 한국을 향해선 “한국정부가 개인의 청구권을 없애 버렸으니 그걸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했으면서 일본을 향해선 “당신들은 보상 끝났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쟁관련 보상이었고 식민지배에 따른 억압과 고통에 대해선 보상한 적이 없다”고 말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모순으로 느껴질 수 있고 어느쪽이 진짜냐! 라고 묻고 싶어지겠지만 이런 식의 논리전개가 된 건 결국 대립하는 문제의 해결방법은 각자 자신의 문제를 보는, 자기비판적인 시각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커다란 틀에서 누가 잘못했는지에 대해선 명확히 썼습니다. 일본의 지배가 문제이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정대협등 지원단체는 보상과 배상의 의미를 구별해서 쓰고 있어요. 위안부문제는 “법을 어긴 국가범죄이니 입법을 해서 배상하라”라는 의미에서 “배상”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학자들이 말하는 건
더이상 “강제연행”이 아닙니다. 오히려 식민지에선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저에 대한 고발장에서조차 쓰고 있더군요.
“약취,사기”로 업자들이 데려 왔다 해도 알고도 받아들였으면 범죄이고 일본군이 알고도 받아들였을 거라고 말하고 있는데 실은 알게 된 경우 업자에게 다른 곳에 취직하게 하도록 시키거나 돌려보낸 경우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이전에 계약서를 확인해 업자의 사기나 납치를 방지하려 했구요. 그러니 전부가 그렇게 하지 않았을 수 있지만,일본의 공식방침은 위의 주장과는 다르다고 해야 하구요. 알면서 묵인한 경우도 없지 않았겠지만 그 경우 업자가 이미 돈을 주고 사 왔다던가 하는, 일본군으로서도 관리영역 바깥의 경우였으리라 생각합니다. 전 그래서 수요를 만든 자체–전쟁을 일으키고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식민지로 만든 지역의 사람들까지 전쟁터에 동원한 책임, (의도여부를 떠나) 묵인한 책임을 물은 겁니다. 위안소를 공식적으로 만든건 근대일본이 시스템화에 능숙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요. 그리고 모두 획일적인 위안소가 아니었다는 것도 인식해야 하고요. 일본에서 강연할 때 유곽에 있었던 사람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기에, 유곽을 군대용 위안소로 지정한 곳도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동시에, 지정업소가 아닌 곳에 있었던 사람(여기에도 비지정이지만 인가업소-유곽의 위생시설등 체크했던 업소와 인가조차 못받았던 이른바 사창도 있었다는 걸 “우리는”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대화의 접점을 찾기 위해서는 가장 강력한 피해에 주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와 다른 부분을 소거시키고 싶은 욕망에 이기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전 그걸 지적했던 거구요.
“보상”이라는 단어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한국어판을 쓸 땐 기금과는 달리 “정부국고금”으로, 기금을 받지 못한 분들께 추가 보상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었고 그런 의미입니다. 국회를 거치지 않는 정부보상금이지요. 다만, 이후 국회결의를 하는 게 가장 좋겠다고 생각했고, 일본어판에선 그렇게 썼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다시 기회되면 말씀드리지요.

2. 와다교수의 의견(국고금으로 보상금지급)과 같나?

한국어판 내고 나서 다른 자료들을 보면서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와다선생님과 달리 국회결의를 주장하는 겁니다. 오히려 보상금을 어떻게 할 건지는 더 첨예하게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주장(국민동원의 한 형태다)이 받아들여진다면 입법이나 국고금 지급도 가능할지 모르지만 “강제동원을 했으니 배상하라”는 현재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또 일본한테 보상금을 대신 받은 한국정부가, 할머니들에게 4천만원 이상 지급했고 매달 이런저런 형태로 지원하고 있다는 것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겠지요. 할머니의 체험은 다 다른데 해결은 “하나의 방안”으로 정해야 하는 정치/국가 문제가 되었을 때 어떻게 할머니들의 다른 목소리에 각각 귀를 기울이면서도 합리적으로 판단할 것인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3. 현실적 타협론인가?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기본적으로는 아닙니다. 합리적이고 옳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명분에 무게가 실려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백년이 걸리더라도” 라는 말로 주장을 관철하는 건 첫째 당사자를 무시(얼마전에 만난 할머니는 사죄조차 요구하지 않고 보상만 해 주면 된다고 해서 오히려 제가 당혹스러울 정도였습니다. )하는 일이고, 할머니의 의견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도 인식될 필요가 있습니다. 들리지않을 뿐이지요. 부산정대협회장님을 만나 보세요. 지방에 계셔서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 문제 해결에 사비털어가며 20년이상 애써 오신 분인데 그분 말씀이 “나도 내 돈 내가며 신문광고를 통해 기금을 반대했다 .하지만 할머니들 돌아가시는 거 보면서 받게 할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우리 여성지도자들(이 분은 이화전문여고출신의 할머님)이 못 받게 했다”고 하시더군요.

4. 제가 받는 인신공격적 비난이 안타깝다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 문제가 해결되려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한 심층취재와 인터뷰가 필요합니다. 외부의 비난과 우려 속에 있는 현재 한국사회의 문제를 외부가 아니라 우리스스로 들여다보고 아프더라도 직시하는 일로 치유해나가기 위해서도요. 저는 제 사태를, 2009년의 서경식교수의 한겨레 칼럼이후에 저에 대한 오해가 확산되면서 5년후에 지원단체에 의한,아마도 쌍방이 의식못할 “대리고발”을 당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오해의 종류도 다양하고 지식의 폭도 달라서 더 어려운데, 정치나 개인적인 이익에 이용하는 사람들, 단순오해로 비난하는 이들에게 동조하는 지식인들의 행태가 가장 한탄스럽군요. 저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을 위해서.
언론에 대해서도 깊이 실망해 왔지만 그래도 제대로 보려하는 분들이 계신 걸 잘 압니다. 기대를 놓지 않겠습니다. 건필하시길 빕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70165993010314

渦中日記 2015/1/13

멀리 사는 페친이 아름다운 찻잔을 보내 주었다. 황금빛찻잔. 바깥이 아니라 안쪽이 황금빛이어서 마음에 든다. 귀모양으로 살짝 구부러져 있는 건, “차를 마실 때 귀기울이는 순간을 떠올리며”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페친이 늘어나다 보니 진득하게 “귀기울이는 순간”이 적어진다. 읽었다는 표시로(공감했다는 표시조차)”좋아요”를 누르지만 가볍고 가벼운 소통에 회의가 든다. 아무래도 페친을 좀 정리해야 할 것 같다.

어제 대통령기자회견은 다 들어 볼 생각이었는데 그만 십분을 못 넘기고 꺼 버렸다. 대통령에게 부족한 건 말하는 기술이 아니라 “귀기울이는” 자세였다. 소통은 귀기울여, 정성껏 듣는 일에서 가능해진다. 대통령은 会見을 했지만 누구도 만나지 않았고 보지 않았다.

대통령 뿐 아니라, 나와 다른 이의 말(생각)은 듣지 않고 배제하려는 욕망이 진영과 상관없이 넘쳐난다. 그래서 내겐 경제적 양극화 이상으로 심리적 양분화문제가 심각해 보인다. 프랑스테러사건이 남의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 것도 그 때문이다. 갈등관련 뉴스를 볼 때마다 소리없는 총성을 매일밤 듣는 기분. 대체적으로 따뜻하고 지적이지만, 페북에도 조롱과 냉소와 욕설이 넘친다.

어제 나는 책의 초고를 보여주기까지 했던 가까운 지인에게 아주 약간 비판을 받고, 배신감에 잠시 분노했었다. 그리고 곧바로, 그건 내가, 책에 대한 모든 비판이 현시점에서는 고발을 지지하는 일이 된다는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물론 고발취지가 이제 “논지”를 문제시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그건 틀린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건, 내가 문제시해 왔던 “강자로서의 피해자”가 된 순간이기도 했다. 피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어떤 비판도 들으려 하지 않는 자세. 피해자의 오만.

어쩌면 우리의 대통령의 “불통”도 거기서 온 건지도 모르겠다. 압도적 폭력을 만났던 트라우마가 만든 도덕적 우위.

아무튼 분열과 혐오가 넘치는 사회를 차세대에게까지 물려줄 수는 없으니 “귀기울이는” 일을 좀 더 해야 할 것 같다. 깊고 고요한 밤과 마주하는 것처럼. 우주처럼 이해불가한 안팎의 타자들에게.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40619592631621

渦中日記 2015/1/10

페북에 <받은 메시지함>외에 <기타메시지>함도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고발사태 직후에 받은 메시지들을 반년이 넘도록 모르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제서야, 반년이나 늦은 답장들을 보냈다.
그런데 이 메시지를 주신 분은 이미 계정이 없었다. 너무 죄송한 마음. 혹 이 분이 누구인지 짐작이 가고 연락이 닿는 분이 계시다면 알려 주시면 좋겠다.
당시 받은 메시지들을 뒤늦게 읽으면서 약간 가슴이 싸아했다.
이제 곧 7개월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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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저는 미국에 30년을 거주하고 있는 ……라고 합니다. 메시지를 보내고자 마음 먹은 이유는, 한국인의 일반적 “정서”에 반하는 이슈에 대해 방대한 자료를 정리하여 책을 저술하신 교수님의 노고와 용기에 감사드리고, 현재 교수님께 가해지는 수많은 비판과 질타에 굴하지 마십사고 응원하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는 제가 살았던 Pasadena 에서 20여분 거리의 글렌데일에 위안부 동상을 세운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부터 였습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에 왜 애정이 없겠으며, 일본의 침략에 왜 분노하지 않겠습니까마는, 글렌데일이 자매도시들을 소개하기 위해 할애한 공원에 한국이 제일 먼저 위안부 소녀동상을 세웠다는 사실은 시의 취지와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저는 동상건립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고, 그러다 보니 이 문제에 대해 여러 자료들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중 제가 가졌던 가장 큰 의문점은 위안부가 차출되었던 다른 나라들은 조용한데, 왜 유독 한국만 이렇게 난리를 치는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러다 약 한달 전 웹에서 <제국의 위안부>의 발췌부분들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곤 비로서 많은 부분들이 이해되었습니다. 특히나, 책은 위안부 이슈가 어떤 과정을 거쳐 전개되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를 사신 저의 어머님이 말씀하셨던 부분들과도 일치했습니다.

현재 교수님께 비판을 가하는 많은 지식인들은, 교수님이 들춰내신 팩트가 불편한 듯 합니다. 팩트의 일부만 조명했다는 사람들은, 이전에는 알려진 팩트가 거의 없었고 감정만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고, 일부 사람들은 “강제 vs. 자발” 이란 이슈가 칼로 무우쪽 자르듯이 쉽게 단정지을 수 없는 상황임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강제라고만 억지부리며 “매춘”의 측면에는 한점의 고려없이 무조건 비방만하고 나서는 듯합니다. 뿐만 아니라 교수님이 책에서 기술하신 한국측 실수/조작/통제 등은 아예 무시합니다.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이 이런 편파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감정이 지배하는 사회, 특히나 그 감정이 적개감일 때, 사실에 근거하고 이성에 입각하여, 이에 반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라 봅니다. 교수님의 저서가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는 만드셨지만,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의 의문을 해소해 주셨다는 점을 어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앞으로 다가오는 어려움들을, 책을 저술하셨을 때 가지셨던 동일한 용기로 지혜롭게 극복해 나가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어눌한 한국말로 두서없는 글을 쓰서 죄송합니다만, 소리없이 교수님을 응원하고, 저서에 공감하는 사람도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2014/6/21)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38835126143401

渦中日記 2015/1/5-2

일본어판을 만든 편집자가 보내준 어제날짜 마이니치신문사설을 보면 일본인들이 내가 던진 공을 받아 주었다고 느낀다.
이런 자료들을 법원에 제출하면 다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한들, 원고측은 일본인들이 내 책에 호응하는 건 내가 일본의 나팔수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겠지. 재판이란 서로 소설을 쓰는 거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이 생각나는 우울한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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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70년 담화에 필요한 것은,전후 50년 때 발표된 무라야마담화를 전후일본의 흔들림없는 기반으로 삼고,그에 입각해 미래를 전망하는 자세일 것이다. 무라야마 담화는 <과거의 한 시기에 국가정책을 잘못 정하여><식민지지배와 침략으로><아시아국가들에 커다란 손해와 고통을 끼쳤다>라는 인식이 핵심이다 .
(중략)
일본에서는 아사히신문의 오보를 계기로 위안부문제 제기자체를 부당하다고 하는 논조가 생겨나고 있다. 사실관계를 수정하는 건 필수적이지만, 위안부를 필요로 했던 사회의 추악함은 어떤 반론으로도 변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의 박유하 세종대 교수는, 최근저서<제국의 위안부>에서,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설을 비판하면서 <전쟁에 동원된 모든 이들의 비극 안에 위안부의 비참을 위치시켜야 성까지도 동원하는 “국가”의 기괴함이 드러나게 된다>고 쓰고 있다.
(중략)
이제 역사를 배타적인 민족주의로부터 차단할 때다. 타자에 대한 상상력을 가져야만 그 주장은 받아들여진다. 일본의 정치지도자는 편협한 자기중심역사에 갇혀서는 안된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33801089980138&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4/12/15

일본에 가기 전에도, 가서도, 그리고 다녀온 이후에도, <재판자료>라는 걸 여전히 붙들고 있다. 이제 익숙해져서 쓰여 있는 말들을 분노와 답답함보다는 이해로 대할 수 있게 조차 되었지만, 무의미한 심적/신체적 노동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가중중. 그렇게 반년이 지났다.

일본에서 만난 아들이, “명예훼손”재판을 방청하고 왔다면서 그랬다. “엄마도 명예훼손을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가 필요한 거 아니야?”라고.

아니,아들아. 엄마한텐 지금 “인권”변호사가 필요해.. 이런 일에 시달리느라 잃어버린 시간들을 되찾아 줄. 책이나 음악이나 사람이나 풍경에 오롯이 빠질 수도 있었던, 인생의 한 때를.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17978541562393&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4/12/7

하루종일, 곡해와 오해, 심지어 하지 않은 말까지 했다고 주장하는 글들과 마주하다 보니 피로가 극에 달하고 있는 중이다.
자신이 쓴 논문이나 책에 의문을 가진 이가 있다면 대답을 해야 한다. 하지만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하거나,독해 자체에 문제가 있는 질문에 대답하는 일은 심신을 지치게 한다. 심지어 공적인 장이 아니라 수사관이나 재판정에 내기 위한 것이라면. 더구나 다른 할 일도 기다리고 있는 일요일을 그런 작업에 온전히 바쳐야 하는 것이라면. 법의 힘으로 “의무”로 다가온 일이라면.

진 기억이 없는 3억의 채무를 요구하는 서류에 대답하면서,도로감에 심신이 갉아먹혀지는 느낌. 사죄하러 가지 않은 내게 그들이 원한 건 이런 것이었을까. 피로가 아니라 도로감때문에 손드는 일.
12월 첫 일요일. 우울한 오후에.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13002972059950&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4/11/30-2

조선닷컴에 관한 언론중재위원회의 결정은 고발당일과 다음날 이틀동안 쏟아냈던 9개의 보도를 삭제하고 반론보도를 낸다는 내용이었다. 7월에 올렸던 포스팅링크들를 다시 보니 이미 삭제되어 제목조차 확인할 수 없는데, 거의 같은 내용을 <제국의 위안부, 충격을 넘어 경악><박유하 교수,알고보니 와세다대학 출신>이라는 식으로 제목만 바꾸어 내보낸 기사들이었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기록을 위해서다. 조선일보와 조선닷컴은 같은 회사는 아니라지만, <조선>이라는 이름을 단 매체이니 이제 이름에 값하는 품격있는기사를 써 주었으면.

http://m.chosun.com/svc/articl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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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08520755841505

[조선일보 반론보도문]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 교수, 원고 측 주장에 대해 공식 반박

나눔의 집에 기거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이 위안부를 ‘매춘부’나 ‘일본군 협력자’로 매도했다며 관련 서적을 출판한 저자 등을 상대로 법적 대응에 나선 데 대해 저자가 공식적으로 반박에 나섰다.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에서 생활하는 강일출 할머니 등 9명은 지난 6월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57·여) 세종대 일어일문학과 교수와 뿌리와이파리 출판사 정종주 대표(51)를 고소하고, 출판·광고 등을 금지하는 가처분을 신청했다. 서울동부지법 민사 21부(부장판사 고충정)에서 7월 9일과 10월 2 일 2차례 가처분신청에 대한 심리가 이루어졌다.

원고들은 당초 “책은 위안부 피해자들을 매춘이나 일본군의 협력자로 매도할 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그런 모습을 잊고 스스로 피해자라고만 주장하면서 한일 간 역사 갈등의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고 기술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박 교수는 “내가 비판한 것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아니라 지원단체이다. 매춘이라는 단어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단순히 매춘부라고 생각하는 일본인들을 비판한 부분에서 쓴 것인데, 나눔의집 소장과 고문변호사 등 주변인들이 이런 문맥을 왜곡 전달해 사회적 지탄을 받도록 만들었다”면서, 원고 측 주장을 확인 없이 실은 언론사들에 대해 10월 20일자로 언론중재위윈회를 통한 정정보도와 반론보도를 요청했다고 말했다.

박유하 교수는 “이 고발은 나눔의집 고문변호사가 학생들을 데리고 한 초급수준의 분석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며 “첫 고발장에서 원고 측은 내 책이 허위라고 비난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인식했는지 슬그머니 고발 취지를 바꾸어 인식문제로 들고 나왔고, 이 책이 일본의 위안부문제 ‘부정파’들을 비판한 책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무시하고 위안부 할머니를 비판한 책인 것처럼 호도했다. 도중에 고발 취지를 바꾼 것고발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가 이제까지 단순히 ‘전쟁범죄’로 취급되어온 위안부 문제를 ‘제국주의 통치기술의 일부’로 파악하고자 한 시도라고 말한다. 그러한 시도가 오히려 ‘배상은 끝났다’고 말하는 일본을 설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문제시 되었던 ‘동지’와 ‘매춘’이라는 단어는 위안부에 대한 폄하가 아니라 그들이 ‘제국 일본의 통치 속에서 전쟁 수행에 동원된 집단’이라는 틀로 바라보기 위한 논리적 장치이고, 일본과 싸운 다른 나라의 위안부와는 처지가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라고 말한다. 위안부들과 군인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임금노동이었으며, 이 사실을 명확히 인식한다고 해서 일본을 면죄하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박유하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는 ‘강제연행’이나 ‘매춘’ 여부와 상관없이 일본에 책임이 있음을 일본에 말하고자 쓴 책인데, 이에 대한 지원 단체의 반발은 그들이 유포한 인식에 오류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데 대한 두려움 탓으로 이해한다”면서 “그동안 우리 사회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은 할머니들이 다른 목소리를 내거나 행동했다가 지원 단체에게 비난받아 할머니들이 공개적으로 발언하지 못하는 분위기 때문” “더 늦기 전에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일은 할머니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제대로 듣는 일”이라고 말했다.

고발 이후 ‘제국의 위안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서평들이 다수 나왔다. 가처분신청 직후에는 김철(연세대)·박삼헌(건국대) 교수 등이 주도한 기각 요청 탄원서에 라종일(전 주일 대사)-문정인(연세대) 교수, 김원우, 장정일씨 등의 작가, 김규항씨(‘고래가 그랬어’ 대표)를 비롯한 200여 명의 지식인과 시민이 서명했다. 특히 페이스북에서 일면식도 없었던 김관기 변호사가 무료변론을 자청하고 나섰고, 노혜경(시인) 등 문화인들과 시민들의 옹호 움직임이 활발하다. 미국 텍사스에 있는 김미영(오스틴 대학) 교수의 제안으로 미국-호주-한국을 잇는 지원연대도 만들어졌다. 박유하 교수는 이에 대해 “SNS 커뮤니티의 가능성을 본다. 이들은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한국사회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온 이들이기도 하다. 이들과 함께 한국사회의 문제적인 부분을 바꿔나가고 싶다” 고 말했다.

박 교수는 또한 “유엔 산하 인권위원회나 미국 의회의 위안부 문제 인식에는 네덜란드나 중국의 경우가 조선에서도 똑같이 행해진 것처럼 오해한 부분이 있다. 지난 8월, 위안부 문제를 20년 넘게 가장 진지한 자세로 보도해왔던 아사히신문이 한반도에서의 강제연행설을 퍼뜨린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이 허위였음을 밝힌 이후, 일본정부는 유엔 등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이 사실을 알리며 수정을 요구 중이다. 이러한 상황을 한국이 신속히 들여다보고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면서 “이 문제를 지원 단체에게만 맡길 게 아니라 모두 함께 지혜를 모아 슬기롭게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지원 단체는 내 책을 허위라고 말하더니 이번에는 내가 식민지 지배를 옹호하고 전쟁범죄를 찬양하고 있다며 또 다른 마녀사냥을 시작했다”면서 “이 책은 출간 직후 다수의 서평과 인터뷰를 받았던 책이다. 정작 관계자들은 10개월이나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고발한 것은 불통사회가 된 현대 한국사회를 상징한 사건으로 생각한다. 그들에 대한 비판을 입막음하려는 시도로 이해하고 있고 지원자들과 함께 잘 대처해 나가겠다”고 한다.

이어 이 책은 원래 일본을 향해 이 문제에 관한 일본인들의 생각을 비판하고 다시 생각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본매체에 연재하다가, 한국도 알아야 할 부분이 많다고 여겨 한국어판을 먼저 내게 되었다고 밝혔다. “최근에 나온 일본판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사죄 의식을 담은 일본 국회 결의가 필요하다고 썼다. 기존 지원 단체와는 내용도 논리도 말하는 방식도 다르지만 나의 논지가 이 문제를 부정해온 일본인들을 움직여 꽉 막힌 위안부문제해결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게재일 2014년 11월 30일 조선일보 (원문보기)

渦中日記 2014/11/27

어젯밤엔 오랫만에 잠을 설쳤다. 보고 싶지 않아 미루어 두었던 한달 전 영상을 봐 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끔, 나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이 사태가 정말 현실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어쩌면 내가 아직 버티고 있는 건, 그 현실성(적의)에 “제대로” 직면하지 않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제 세번째 재판이 있었고 가처분심리는 이제 끝났다.
원고측은 6월16일 첫고발장에서 “박유하의 책은 거짓말투성이”라는 식으로 말했었다. 7월과 9월초에 답변서를 제출했더니, 9월중순으로 예정되어 있었던 심리를 일방적으로 연기했다.
한달후,10월21일에는 고발취지를 바꾸는 신청을 하면서, “박유하의 책은 거짓말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논지가 자신들이 생각해 온 것과 다르다. 그렇게 쓴 박유하의 인식은 한국사회가 추구해온 정의에 반한다”고 했다. 웃지 못할 일은 센댈의 <정의론>까지 인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11월 24일, 다시 추가된 세번째 문서에선 이렇게 썼다. “박유하의 생각에 대해 말하는 건 조심스러우나 해결을 위한 방식이 우리와 다르다. 그래서 그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이 5개월동안, 그들은 이렇게 말을 바꿔왔다. 싸움을 걸었으니 이겨야 할테고, 그러기 위해 말을 바꾸는 건 사실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 최소한 그들이 잘못 알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한번쯤은 언급해야 하는 거 아닐까. 남의 책을 함부로 훼손한 데 대한 잘못정도는 언급하는 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 아닐까. 책을 왜곡요약해 전국민의 비난이 몰리도록 만든데 대한 사과쯤은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싸움을 하더라도 지켜야 할 룰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내가 이 재판에 대한 절망적인 기분이 드는 건 이런 부분이다. 그들의 생각과 맞지 않으니 허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 같은 건 오히려 웃어넘길 수 있다. 말하자면, 오류는 용서할 수 있지만, 비겁한 건 견디기 힘들다.

담당변호사들과 고발장작성을 도왔을 연구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이 원하는 건 무언가? 정말로 “할머니의 명예”인가? 지원단체나 기존 연구의 명예인가? 자신들의 “생각”자체인가? 유일선”으로 생각한 그걸 지키기 위해서는 타인의 명예를 짓밟아도 되는가? 당신들이 말하는 “정의”란 그런 것인가?

제국의 위안부 소송 2차심리 나눔의집 기자회견 / 박선아

http://youtu.be/wfqeQ0qXGJo

본문:

渦中日記 10/3

멀리서 페친 정나란님이 오신 걸 계기로 야심차게 만남의 기획을 했는데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줄 “가을햇살”과 청명한 하늘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다 어제부터 컨디션이 좀 이상하더니 감기기운. 따끔거리는 목과 묵지근한 근육통을 핑계로 머리맡에 책 몇권을 쌓아두고 게으름을 피울 특권을 누리고 있다.(하여 어제 올린 포스팅은 혼자보기로 돌려 두었다. 술을 마시긴 글렀고 오랜시간 앉아있는 것도 무리일 것 같아, 정나란님과 호젓하고도 조용한 대화의 시간을 가질 예정. 개별적으로 연락 드렸지만 참석해 주시겠다 한 분들과는 다음 기회에 만나기로 했다.)

페친들이 언급하기에 봐 봤던 한 드라마가 정신(마음)을 앓는 사람들을 다룬 건 소재만으로도 탁월해 보였다. 사실 마음의 병을 앓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우울증”이니 “스트레스”니 하는 단어들이 생기면서 관리가능한 정도의 마음의 병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사회 속을 활보하지만, 실은 누구나에게나 그 활보가 버거운 순간은 있기 마련이다. 스스로가 관리할지 타인에게 관리를 부탁할지의 차이일 뿐.
“일”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거나, 필요한 이야기가 아니라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이야기나 대상으로 도피하는 건, 아마도 그런 “자기관리”의 시간들일 것이다.

어제는 반론을 쓰기 위해 이재승교수의 비판을 다시 읽었는데 비판자체보다 비판에 담긴 적의와 마주하는 일이 또다시 나를 우울하게 했다.
나의 싸움은 재판이나 폭력과의 싸움이 아니라, 오에겐자브로의 소설에서처럼 슬픔이 내 얼굴에 곰보자국을 남기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수많은 적의들이 나를 망치지 않도록 보호하는 일. 분노도 경멸도 오만도 아닌, 다른 자세로 마주하는 일. 적의의 바다에서 헤엄쳐 나오는 일. 그럴 수 있도록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일. 경험의 흔적을 다른 형태로 남기는 일.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웠다는 날. 나라보다 먼저, 자신을 꼿꼿하게 세우는 일들이 도처에 필요해 보인다. 오늘저녁엔, 미움과 폭력과 적의에 의해 ‘찌그러진’영혼들을 위해 건배해야겠다. 의심과 증오와 욕망에 의해 일그러진 영혼들을 위해서도 무언가 해야겠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68931486467099

渦中日記 8/7

소장에 있었던 <문제>시 된 부분에 대한 반론을 쓰는 중. 한번 공개된 글은 특별한 경우 아니고는 거의 다시 안 보는 편인데 이 책은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이 여름,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더웠던 여름으로 기억될 것 같다.

民事裁判用の資料を作っている。100箇所以上の「問題」とされたところにすべて、いちいち反駁しなければならない。人生で、もっとも暑かったと記憶されることになるだろう夏の日々。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934231029937145&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8/7-2

오후에 모월간지와 인터뷰를 했다.의뢰가 왔을 때 주저한 이유가 두가지 있었지만,결국 수락한 이유는 기자가 고발사태 이후 나와 책에 대해 나온 언론보도에 왜곡이 많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기사내용은 물론 제목까지 확인하고 합의된 시점에서 내보내기로 약속.

만나보니 그의 문제의식이 진심인 것 같아 다소 안심했는데,그런 나에게 “기사가 나와봐야 안다”고 견제구를 날린 건 인터뷰에 동석해 주었던 젊은 친구들.
기자를 믿지 못한 건지 나를 믿지 못한 건지는 모르겠지만,한달 전부터 이들이 너무나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346224565646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