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위안부, 또 하나의 생각: ‘적은 100만, 우리편은 나 한명’

할머니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고 했다. 경상도 출신이고, 초등학교 5학년까지 다녔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직업소개소에 친구와 같이 갔다고 했다.

여성의 초등학교 졸업은, 무학이 많았던 당시로서는 상당한 학력이 된다. 실제로 할머니는 당신이 있었던 곳 등 필요할 때 종이에 한자를 써서 보여주기도 했는데 놀라울 만큼 달필이었다.

이후 시작된 나와 배 할머니와의 대화가 주로 전화로 이루어진 것은, 이 날의 나눔의 집의 경계의 결과다. 가족이 없는 할머니는 자주 전화를 걸어 오셨고 그렇게 할머니가 마음을 열어 주신 것이 나는 감사했다. 배춘희 할머니는 일본어를 가끔 섞으며 말씀 하셨다. 내가 일본어를 안다는 사실이, 일본어로 교육을 받았을 배할머니의 마음을 열게 만든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후 반년 여동안, 할머니는 자주 내게 전화하셨다. 그래서 나는 허락을 받아 녹음을 하기 시작했다.

이하는 그 녹취록을 정리한 일부내용이다. 첫 녹음은 12월 18일 저녁. 할머니가 전화하셨고, 우리는 한시간 이상 대화했다.

너무 길어지지 않도록, 대화를 좀 정리해 보았다. 맥락을 알 수 있도록 나의 말을 살려둔 부분도 있다. 이 날 할머니는, 강제연행을 포함한 위안부문제에 대한 생각, 우리사회의 대응에 대한 생각, 나눔의 집 할머니들과의 갈등, 나눔의 집 사무소와 할머니와의 관계 등에 대해 말씀 하셨다.

모든 이야기에서 할머니의 그간의 고독이 묻어났다. 물론 여기서 발화된 할머니의 생각이나 의견만이 옳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이 날도 할머니는 다시 ‘적은 백만, 우리편은 나 한명’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할머니는 그렇게 고독을 호소했지만, 나는 그런 할머니의 고독을 결국 덜어드리지 못했다.

(대화에 나오는 개인명은 복자 처리했다. 녹음이 좋지 않아 내용이 확인되지 않은 부분도 일부 있다. 괄호 처리부분은 내가 할머니께 한 말이거나 이 글을 쓰면서 추가한 나의 생각이다.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말 중 유추 가능한 부분은 보완했고, 어미 등 말을 다듬은 부분도 다소 있다. 생략 처리한 부분은, 공개할 의미가 크게 없거나 다른 할머니들과의 심리적 갈등부분이다.)

(녹취일 2013/12/18 18:19:24)

<불신>

할머니는 자주,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자신의 주변상황에 대해 비판하셨다.

이 날은, 위안부가 군대를 따라 다녔다고 쓴 교학사 교과서가 문제가 되었던 날이었다. 나눔의 집에 기자들이 취재하러 왔던 모양이었는데 그 때 대응에 대한 불만을 말씀하셨다.

정리하자면, 교학사 교과서를 부정하려고 내놓은 자료는 “테레비에서 밤낮 그거 하나만 십 몇년… 내가 온게 18년 되어가는데 밤낮 고거 한장만 내놓는” 자료였다.

“그 장면은 중국이 아니다. 필리핀이나 다른 나라일 것이다.” 라면서 “동양의 군인들이 웃통 벗고 서 가지고..” 나오는 사진에 대해 “큰일나지 그거. 헌병들이 막 따라 댕기는데.”라고 하셨다. 이어서

“옛날에도 우리도 봤지만, 일부 사람들이 한국에서 무슨… 해가지고 그런 장사 한 사람 한국에도 없고 중국에도 없고…

전부, 우리끼리 하는 말인데, 전부 한국사람… 또 중국엔 중국사람들이 주인노릇하고, 이제 한국사람들이 중국어 잘 해 가지고.. 전라도 사람? 태안(?)사람들이 장사했지,

일본사람들은 한국에서 옛날에 캬바레.. 캬바레 하고 노미야(술집)같은 그런건 좀 했는지 몰라도, 여기서 뭐 손님들 상대해가지고 몸팔고 하는 그런 장사는 한 적이 없거든 일본사람은. 중국에도 없고.”

(근데 할머니들은 일본사람도 많이 있었다고 얘기들 하세요.)

일본인이 경영하지는 않았다는 건 할머니가 잘 못 아신 걸로 보인다. 할머니는 하얼빈에 계셨는데 하얼빈에 일본인 경영자가 적었을 수도 있겠다.

“그거는 메챠쿠챠(엉터리로)하는 소리야. 그거 뭐… 함 내놓으라고. 주소 어데고 어디서 그런거 하는지. 그런 사람들… 위치(주-있던 장소) 한번 물어봐야지. 그런 것도 내 생각에는 너무 참 사람이 그야말로 또 하는 소리지만 이승에서는 とおるか知らないけど、저승에서는 通らないよ(이승에서는 통할 지 모르지만 저승에선 안 통한다고)”

(그런 얘기 딴 사람한테는 하신 적 없으시지요?)

할머니의 생각이 어디까지 맞는지는 모른다. 아무튼 할머니는, 다른 분들 중 일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계셨다. 배춘희할머니가 나눔의 집에서 고독했던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내가 어떨때는… 딴 일에… 뭐 이것도 그렇지만, 아이고 뭐 이승에는 그런 일이 통할란지 모르겠지만 저승에는 안 통할껄~ 하고 말하면 삐쳐 가지고…”

(아, 직접 말씀하신 적도 있어요?)

(중략)

<나눔의 집과 위안부할머니>

“***가… 아름다운 재단에 일본 정부에서 비밀로, 정부의 돈이 아니라 민간의 돈을 써서(?) 오천만원 받고, 또 지 돈 5천만원 하고.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했잖아. 그런데 그 사람들도 성격은 또 뭐냐하면. 여기 사무실에 그 때 ?님 있을때 500만원 하고 1000만원 하고… 말로는 그래 2500만원을 사무실에 줬다. 사무실에도 기부금으로 주는건가보다 고맙다 하고 사무실에서는 받았거든. 받았는데, 이게 막 또 할매들끼리 싸움이 일어나면…
(중략)”

(할머니들이 사무실에 돈을 드리는 적도 있군요, 몰랐어요.)

여기서 언급된 할머니는 아시아 여성기금을 받으신 분이다. 하지만 배할머니조차 ` 5천만원이 일본정부의 돈이 아니라 민간의 돈을 써서` 지급된 금액이라고 이해하고 계셨다. 그 금액이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되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재단은 그 돈이 `일본국민의 돈`이라는 걸 알고 받았을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나는 박원순 시장이 서울시장에 나설 때 그에게 표를 던진 사람이지만, 박시장은 2000년 도쿄에서 열린 여성국제전범재판에 `검사`로서 참여한 사람이다. 서울시장 당선후, 정대협에 대한 여러 지원이 이루어 진 것도 그런 관계의 연장선 상의 일로 보인다.

<회의>

(중략)

“아이고 여러가지고 全然 여기 わけがない (사람이, 뭐 지가 사는데. 그렇다고 해가지고 어디 학교 나온 사람들이 있나, 아무것도 모르고 이게 저 말로는 2학년 댕기다가 어쩌고 저쩌고. 여기 가면 딸이 있다 누구집 가면 딸이 있다 누구집 가면 딸이 있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그걸 다 알아. 그게 이상하잖아.”

(아.. 아는 게 이상하다구요?)

“여기 사람들한테… 잡혀갔다 이러니까는, 밖에 있는데 잡혀갔다…”

(아 어느 집에 누구 딸이 있는지, 마을사람들이 아니면 어떻게 아냐는 얘기시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 어찌 알아서 그렇게 했는지, ??~~~론적인 얘기하려면 이상하잖아.

(중략)”

할머니는 일관되게 지원단체와 일부 위안부할머니들의 이른바 `강제연행` 주장에 대해 회의적인 말씀을 했다.

나를 비판하는 운동가들은, 자신들이 정리한 증언집에 그런 이야기가 다 있으니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막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왜 전달과정에서 `다른 목소리`가 배제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혹은 국내언론과 일본과 국제사회를 향한 운동에서 왜 그와 반대되는 목소리만 강조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나는 이제 알 것 같다. 추후에 다시 쓰기로 한다.

 

<연민/고독>

할머니는 자신이 스님이 되어야 하는 운명이었는데 그 `반대`의 길을 살게 되었다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아프리카 아이들을 돕고 싶어 하셨는데, 돕자하던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고 `우리가 더 불쌍하다`고 했다던 다른 할머니께 섭섭함을 내비치기도 했는데 그런 동정심과 연민은 그런 자의식에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중국에서 해방을 맞고 한국전쟁 전후에 일본으로 가셔서 오래 살았고, 56세때 몸이 아파 한국으로 나오셨다고 했다. 귀국을 위해 조카를 한국에서 불러들이셨고 영주권을 반환하고 한국으로 들어 오신 듯 하다.

“일본을 떠날 때 고향에 가봤자 아무도 없는데, 내가 어째서 이런 운명이 됐는가… 하는 그런 마음이 들더라고. 그래 가지고 고향에 또 와가지고, 사촌 형제간도 아홉이 있었는데 다 죽고 한 애 남아있더라고. 그리고 배다른 동생 하나가 부천(?)에 있었는데, (?) 하고 난 뒤에 배다른 동생이 하나 생겼는 모양이지. 옛날에. 그래가지고…. 이걸 小説 아니라 뭐에라도 적을라 하면 참 ..”

처음엔 왜관에 계시다가, 92년도, 김영삼 대통령 때 위안부를 찾는 방송을 보았다고 했다.

“그 때, 배다른 남동생도 있고, 이걸 알면 안되는데 하면서 내가 모른체 하고 있다가…”

“김영삼이 그분이, 그런거 있는 사람은 일체 전부 글 써서 바치라고, 신고하라고, 그런 경험 있는 사람은 바쳐가지고 하라고, (해서). 正直に(솔직히) 나는 대구사람이니, 붙들려가 가지고 한게 아니라… 대구 가서 人事紹介所.. 거기 가서 (네 지난번에 말씀해주셨죠) 그런 얘기 했던게 그게..”

“그때는 민사무소 군청, 그런데서 찌라시, 광고, 광고해가지고 여기에 수원서 어디로 어디로 해가지고 들어오면 된다 하는, 그런.. 찌라시(전단을) 뿌렸으니까 그걸 보고 왔던 거지.”

할머니의 인생 역시 `소설`처럼 기구하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 손에 자랐다가 직업소개소를 찾은 어린 소녀. 친구도 친척도 없는 없는 일본에서 오래 살다가 노년이 되어 귀국한 한 여성.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천애고독`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배춘희 할머니가 초기에 목소리를 낸 건, 그런 고독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침묵/소신>

(제가 궁금했던게, 왜 할머니 얘기를 듣는 사람이 없었나예요. 다른 할머니 얘기들은 다 책이 되어 나와 있거든요. 그런데 왜 할머니 얘기는 들으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나 싶었어요.)

“아니 여기도 대강대강은 하지만, 그 사람들이 뭐 써놓은거 보면, 아이고.. どこまで 뭔지 どこまで (어디까지가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잖아요. 그치만 소설 쓰는 사람들이야 잘 쓰겠지.”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에도 못 담을 거라고 했던 배 할머니는, 이번에는 ‘소설’이라는 단어로 다른 분의 증언에 대해 강한 위화감을 표하셨다.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소설`에 대한 두가지 이해 (일반인이 겪거나 느끼지 못하는 파란만장한 ‘경험’. 혹은 그 반대 의미로서의 ‘허구’)를 배할머니 역시 갖고 계셨다.

사실 할머니들의 경험은 무거운 경험이지만 자신과 주변인의 체험에 한정된다. 그러니 배할머니가 보지 못한 사실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도 나는 배할머니의 위화감을 이해했다. 위안부 문제와 거의 같은 세월 함께 했던 배할머니의 의문에, 오랜 세월 함께 하고 운동에 관여해 온 분들이 언젠가 그 위화감에 대해 ‘응답’해 주기를 바라고 싶다.

(중략)

(할머니 말씀이 굉장히 흥미로운데, 왜 다른 사람들은 그 얘기를 안들었나 싶어서 그래요. 할머니가 얘기하기 싫었던 거예요? )

(중략)

“연구자들은 오면, 또 나한테 특별히 와서 묻는 사람은 없지만은, 여기 윗사람, 또 그리고 다시 오는 할매들도 와가지고 노망든 할매들도 있고, 아파 누운 할매들도 있고, 뭘 조금 알다가 말다가 하는 머리가 좀 치매끼가 있는 이런 할머니들도 있고.. 조금 안다 하는 젊은애한테는 뭐, わけ고(말이고) 지랄이고 하기가 싫어. 全然 저거부터 저거.. 막 또 엉터리겠지 또 勝手に(멋대로) 얘기를? 는데, 내가 뭐 싫어도 니 그거 역사를 알아야지 알아야지… 말 할 것도 없고..

배할머니가 말하는 `조금 안다 하는 젊은 애`란 누구였을까. 아무튼 배할머니는 그를 향해 자신의 체험을 `말`하는 일을 무의미하게 여기셨던 듯 하다. 구술 채록자가 `정해진 대답`을 기대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배할머니의 이야기가 정리된 형태로 남겨지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을 듯 했다.
다른 할머니들의 건강강태에 대한 배할머니의 말씀은 자신의 건강과 엘리트의식이 만든 것일 수 있다. 진실은 나눔의 집 사람들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이로부터 꼭 반년 후 나는 나눔의 집에 거주하는 아홉분의 이름으로 된 고발장을 받게 된다.

(중략)

“군대한테 붙들려갔다 해놓고 또 나중에 보면 뭐, 군인이 막 뭐 열세살 먹은 앨 죽였다 안죽였다 뭐. 그러면 난 뭐 내가 안 들은 얘긴 들을 필요도 없고. 뭐든지 이건 確かだ(분명하다)하는 그런 얘기같으면 몰라, 그런 얘기같으면(?)残すか知らんけど、(남겨질 지 모르지만) 이런 얘기 들으면, 말이 안되는데 싶으면, 난 말 안한다고.”

(아 그래서 말을 안하셨구나. 다른 할머님들 얘기가 좀 할머니 얘기하고 다른것 같아요.)

할머니의 소신을 엿볼 수 잇는 대목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는 일 자체보다, 할머니에겐 진실이 중요했다.

“아 뭐 그 사람들도 개인(대인?)으로는 말 안하지. 딴 사람들이 오면 말 할런지는 몰라도, 할매들… 뭐 그런것도 잘…”

(그러셨구나. 고맙습니다, 저한테는 이런저런 얘기 많이 해주셔서.)

“거긴 뭐 偶然に(우연히) 일본말도 알고, 내가 할라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偶然に 참 이래 말 하고 싶다 하는 그런…”

(저번에도 우연히 테이블에 앉았는데 할머님이 이런저런 얘기 많이 해주셔서 정말 놀라고 기쁘고 그랬어요.)

“내가 일본하고 親戚でもないし(친척도 아니고), 일본에 뭐 特別な(특별한), 뭐 날 따라 와 가지고 이리해 주고 저리해 주고 한 것도 없고, 난 돈 받은 일도 없고..

난 정당하니, 난 그야말로 부처님을 믿어서 그런지, 정정당당하게, 지 속만 알고 있지. 여기있는 사람은 가끔 물어보면 직접은 안들었지만, OOO는 뭐, 말만 하면 막 전부 ~부터 죽였다 ~부터 죽였다, 뭐 죽여도 소문은 언제든지 그 후에 뭐 몇달 후에라도 소문 나는게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더라 하면 소문나는데, 나는 뭐 소문 들은 일이 없는데 뭐, 내가 (이야기를) 만들어가지고 해야 돼? 뭐 어째. 사람은, 短い命(짦은 인생) 아니가, 산다 해도. 잠깐 이 세상에 왔다가 가야 될 사람들인데 뭐할라고 거짓말을 하고 없는 말을 만들고 뭐 하고. 그런 일 절대로없다고. (중략)”

배 할머니의 소신은 불교도인데서 온 듯 하다. 배할머니는 다른 누구보다 자신에게 솔직하려 했고 그 상태를 `정정당당`하다고 표혔했다. `짧은 인생` `잠깐 왔다가 가는 `인생. 내가 배할머니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실제로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좋아하게 된 건 이런 그 분의 성정과 가치관 때문이었던 것 같다. 자신이 생각하는 진실을 말하는 이유가 일본과의 특별한 관계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강조하고 싶어하셨다. 물론 다른 할머니들에 대한 배할머니의 시각이 얼마나 정당한 것인지는 제 3자가 섣불리 판단할 일은 아니다. 배할머니는 다른 분들은 원하는 `비싼 주사`를 마다 하고 덜 비싼 주사를 맞았다는 이야기도 했는데 그 분들이 더 몸이 아팠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배할머니는, 건강과 생명에 대한 욕심이 적었다.

<일본인 방문자>

(중략)

( 어떤 할머니들은 증언하실 때, ‘일본 수상은 우리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어 그 사람들이… 그, 수상이 오면 그렇게 하는게 아니라, ‘우리 죽었나 안죽었나 보러왔나’ 막 이카는데 뭐.

그러니까 막 학생들이 나중에 보면 그걸 알고 막 울고간다고.

아이고 내가 막, 그러니까 (생략) 할머니들이 막 본대로 말하고 나온대로 … 나온대로 일본사람한테, 뭐 속이야 어찌됐든지 말았든지 오면은 그저 ようこそいらっしゃいました (잘 오셨습니다) 하고 인사나 하고, 일본도 참, 이런 일 저런 일 고생이 많죠 하고 빈 말이라도 그런 말은 안하고, ‘너그들 뭐하러 왔는데, 여기 뭐 할머니들 다 죽었나 안죽었나 망 보러왔나’ OOO이 그카면서 달려든다니까 손님한테.”

(학생들한테도요?)

“어어, 그렇게 막 한국말로 그렇게 눈깔을 부릅뜨니까는, 학생들이 이유를 모르니까 울고 있거든.”

(그래도 느낌으로 알겠죠.. 뭔가 싫어하고 그렇다는거를..)

“어, いいこと言わないね(좋은 소리 아니라는 건) 알지.”

(참 마음이 여린 아이들이 많은데 왜 그러셨을까…)

이상이 길었던 어느날의 통화를 간추려 본 내용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할머니의 ‘태도’는 많은 것을 말해 준다. 그저 ‘예의’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의 태도는 대상에 대한 감정과 이해, 그에 더해 성격과 가치관이 만든다. 사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런 할머니의 ‘태도’를 전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에 대한 태도를 넘어 `세상`에 대한 태도와 평화의 관계에 대해서는, 제 3장에서 쓸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