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우, 여성적 관점으로 본 위안부

Andrew Jinwoo Kim

2015년 2월 22일 ·

여성적 관점으로 본 위안부

<제국의 위안부>에서 지적하고 있는 위안부라는 폭력적인 제도의 가장 큰 범인은 가부장주의다. 가부장주의는 역사가 오래되었으며 일본과 조선뿐 아니라 당시 세계 곳곳에 널리 퍼져있었다. 또한 전쟁이 일어나 위안부를 모집하기 전부터도 일본과 조선에서는 성매매가 흔하게 행해지고 있었다. (또한 오늘날에도 그러하다.) 내가 서평에서도 말한바 있지만, 위안부의 archetype로서 17세기부터 존재했던 ‘가라유키상’을 들수 있다. 가라유키상은 특히 메이지유신 이후 많아졌는데, 해외에 나가 있는 일본 상인, 관료, 군인들의 수요에 부응했다. 오늘날 한국의 비즈니스맨들이나 남자 관광객들이 가는 곳에 어김없이 한국식 성매매업소가 들어서고 심지어 그 문화(?)가 한국인들과 사업상 관계를 맺는 현지인들에게까지도 전파되는 모습과 흡사하다고 할만하다.

위에서 내가 든 사례들을 보면, 여성을 성매매의 대상으로 이용하는 것은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19세기식 제국주의 방식이든, 21세기식 자유주의 방식이든 간에, 여성의 몸은 철저히 세계 곳곳으로 ‘진출’하여 국가의 이익이나 기업의 부를 키워주는데 복무해야 할 근대적 남성 주체의 ‘위안’을 위해 희생되고 이용되는 것이다. 비록 가부장주의 자체는 전근대의 유산이지만, 근대와 결합하며 어떤 면에서는 더 악질적으로 변하기도 했고, 남성은 근대의 주체가 될 자격이 주어졌던데 반해 여성은 여전히 객체로 남아있어야 했다. 여성에게 선거권이 주어진 것이 1910년대 이후의 일이었고, 실제 사회생활의 영역에서는 더욱 오랫동안 차별당했다. 산업혁명기의 섬유산업이나 전시의 군수공장 등에서 일은 일대로 했는데 말이다. 전업주부로 사는 것이 덕목으로 강조되던 건 부르주아 가정의 경우 또는 1950~60년대 미국과 서유럽의 중산층 가정의 경우였다.

어쨌든 일제시기 당시 조선의 여성들은, 이미 식민지인으로서 2등 시민 대우를 받아야 했던 차에 여성으로서 이중적인 차별을 감내하고 살아야만 하는 현실에 놓여 있었다. 집안에서도 아버지나 남자 형제, 남편과 시댁에 눌려 살아야만 했고, 사회에서도 종사할수 있는 직업이나 개인적으로 할만한 활동의 선택지가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비록 1920~30년대에 경성을 비롯한 도시의 일부 교육받은 중, 상류층 출신들 중에 ‘신여성’이라는 근대적 여성상이 나오긴 했지만, 대부분의 조선여성들(심지어 일본여성들에게조차)에게 그것은 아주 먼 이야기였다. 어쩌면 종군위안부는, 특히 전시가 되며 경제상황이 악화되어가던 차에, 평범한 식민지 여성의 몇 안되는 삶의 선택지였을지도 모른다.

소설 <감자>에서 무능한 남편을 둔 복녀가 중국인 부자 왕서방에게 몸을 팔고, 심지어 죽어서도 그 댓가(보상금)는 남편과 장의사에게만 돌아가는 것을 볼수 있다. 복녀의 모습은, 그 당시의 적지 않은 조선인 여성들의 현실적인 처지를 나타내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복녀를 우리가 죄인이라 할수 있는가. 죄인은 오히려 왕서방과 남편, 그리고 그 모든것을 용인하는 가부장적 사회가 아닐까.

나는, 위안부로 간 수많은 조선여성들 역시 복녀와 같은 체제의 피해자라고 파악한다. 그렇게 파악할 때, 물리적인 강제연행이 부정되더라도 위안부를 일제의 피해자라고 볼 근거가 생기는 것이다. 사실 <감자>와 같은 이야기는, 계몽주의적 시각으로 보기엔 아주 불편한 이야기인데, 지금까지 우리가 흔히 알고있던 위안부의 서사는 계몽주의의 뒷받침을 받고 있다 사료된다.

이처럼, 모더니티는 결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졌던 게 아니었다. 20세기 초반의 동아시아를 기준으로 보자면, 가장 우선적으로 모더니티의 권리를 향유할수 있었던 이들은 일본인 남성이었다. 그 다음은 조선인, 중국인, 타이완인, 오키나와인, 홋카이도 원주민들 중 근대 문물에 접근이 가능한 남성이었다. 아마도 지주나 상인 계급에 속해있던 이들이 유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은 일본인이건 식민지인이건, 상류계급 출신이건 빈민이건 간에 1945년 이전까지는 모더니티의 수혜자가 되지 못했다. (일본과 한국 모두 여성의 선거권이 1945년 이후에야 처음 보장되었으며, 나혜석을 비롯한 조선의 신여성들은 당시 일본이나 서양의 기준으로 보아도 매우 독보적인 경우에 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