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 Vladimir Tikhonov (박노자)선생께

이소영

https://www.facebook.com/duckling.hyeon?fref=ts

 

2월 18일 포스트

Vladimir Tikhonov 선생님께,(다 쓰지 못했는데 실수로 올라갔습니다. 수정한 글도 다시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박노자 선생님 글을 읽으며 세계관에 영향을 받은 한 여성주의자로서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제 식견이 깊지도 넓지도 못해 실례일 수도 있겠지만 선생님의 글이 저를 계속 아프게 하여 망설이다 이렇게 지면을 통해 물음이랄까 주장이랄까… 하고자 합니다.

저 역시 지배자가 아닌 피해자 위주의 역사해석이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노동자, 장애인, 소수인종, 여성 들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일은 필요한 일이며 <제국의 위인부>는 그 중 피해당사자였던 여성의 입장에서 기존의 역사 틀을 깨고 발언한 것이 문제가 돼 금서?!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전쟁시 여성이 겪었던, 그리고 전쟁이 끝난 지금에도 끝나지 않는, 고통받는 여성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것이 주류의 입장과 달라 <제국의 위안부> 저자는 마치 주류에서 제외된 그 여성들 처럼 돌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 ‘피고인’을 보면 “네가 정숙하지 못하여 당한 일이다”라는 비난을 받는 강간피해자가 나옵니다. 네, ‘가난하고 교육 받지 못한’ 그녀는 정숙하지 못하게 놀았고 남자들을 꼬셨습니다. 그것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내가 끼부린 것은 맞지만 그것이 강간 당해도 좋을 일은 아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좀 거칠게 얘기하자면 <제국의 위안부>는 ‘피고인에 나오는 주인공’같은 여성도 피해자라고 말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정숙한 민족의 딸도 그렇지 않았던 여성들도 모두 전쟁의 피해자라는 겁니다. 이 것이 정대협 피해자 할머님들을 모욕하고 명예훼손 했다는 것인데, 저는 반대로 정숙하지 못했던 우리의 딸들을 배제하는 이긴 자의 역사 속에 있는 분들이 부리는 횡포에 할머님들이 속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툭하면 “우리는 동두천에서 몸 파는 여자들이랑 달라. 우리는 강제로 끌려간 거라구”하시는 할머님들의 주장은 그 자체로 문제가 많은, 차별을 잉태한 발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미 할머님들은 역사의 당당한 주체이며 활동가이며 투사라고 생각하기에 이 발언에 매우 유감이며 반드시 비판 받아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두천에서 몸파는 여성들도 가난하고 배움의 기회가 없어서 그것 밖에 할 수없는 피해자들입니다. 그녀들에겐 선택의 기회가 있었고 할머님들은 강제로 끌려갔기에 선택의 기회가 없었으니 둘은 다르다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위안부할머님들처럼 양지에서 자신의 피해를 말 할 기회조차 없는 이 여성들은 그야말로 피해자 중에 피해자입니다. 제 발로 기기촌으로 걸어들어가 양공주가 됐다해서 자발적선택인가요? 위안부 피해자 여성들도 이렇게 각자의 사연이 많습니다. 아버지가 일본에 팔아넘겨 그렇게 된 경우, 돈 벌러 간다고 생각했다가 그렇게 된 경우, 그야말로 강제로 끌려간 경우, 모두 제국주의 전쟁을 벌인 일본의 구조적 범죄의 피해자이며 이런 기록들을 적은 책이 <제국의 위안부>인 것입니다. 박노자 선생님의 의견과 전혀 다르지 않은데 왜 책이 금서가 되는 것이 다행이라는 것인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전쟁성범죄는 정숙한 여성만을 할퀴고 가지 않습니다. 사회가 인정하는 ‘정숙’의 틀을 벗어났다 해도 피해자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입닥쳐’라는 강요를 받는 피해자. 이들의 얘기를 누락하는 것은 말 그대로, 역사가 강자의 요구대로 흘러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제국의 위안부> 저자는 “한 하늘 아래 함께 살 수없는 여자, 미친 *, 위안부피해자 여성처럼 하루에 몇 번 씩 강간 당해야 할 *”등등의 욕을 먹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야 말로 아직도 그렇고 그런 여성의 문제가 끝나지 않았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여자는 안되고 남의 여자라고 느껴지면 마구 학대하는 그런 사회의 반증, 짐승들의 시간입니다.

(박노자 교수의 본글) 우리 사회는, 아쉽게도 대개는 력사를 피해자 위주로 해석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김홍집은 여전히 개혁가고 유길준은 여전히 계몽가지, 둘이 일군과 공모하여 동학농민 학살을 지저른 범죄자라는 시각은 아직도 주류에 속하지 않습니다. “건국”을 이야기할 때에 그 “건국”의 밑바탕에 깔린 제주4.3부터 시작해서의 여러 학살들을 우리는 보통 의식하지 않습니다. “산업화” 의식에서도 그 과정의 피해자 (저임금 고강도 착취를 당한 노동자)를 먼저 생각하는 게 아니고 그 “성공”(?)부터 의식하게 되고, “한미동맹”을 생각할 때도 그 “동맹”에 희생된 이들 (“양공주”부터 기지촌과 그 주변의 주민까지)을 우리가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공주의/개발주의 사교의 광신자들은 대개 “피해자”에 무관심한 특징은 있죠.

그나마 위안부라는 미증유의 범죄를 우리가 피해자 위주로 의식해야 한다는 게 통념화되고, 이 통념이 이런 판결에 반영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 일이 계기가 돼 일본과 한국, 미국 등의 여타의 성폭력 국가범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폭돼 철저한 진상규명과 피해자 보/배상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특히 조선전쟁 시절의 미/한국군 “위안”시설 운영과 월남 파병 시절의 한국군의 각종 성폭력도 우리에게 “우리 력사의 가장 큰 치부”로 옳게 의식되는 것은, 차후 이런 일들의 재발의 방지에 가장 필요한 조치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여기에서 문제는 “한국”도 “일본”도 “한일관계” 그 자체도 아닙니다. 여기에서 문제의 핵심은 (주로 빈민층 등 피착취계급에 속하는) 녀성에 대한 국가/군대의 조직적 성폭력, 즉 국가/군대의 범죄성, 그리고 그 범죄성에 대한 우리 의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