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언, 법원 가처분 결정을 보며

김도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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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8일 포스트

1.

우리나라는 20세기 초엽 일본제국주의 식민지하에서 많은 고통을 겪은 나라다. 명백한 피해자다. 그걸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과 피해자의 상처를 뛰어넘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내 생각에 우리 국민 대부분은 국가주의의 어떤 의도적인 전략 때문에 우리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에 ‘머물러 있는 상태’인 것 같다. 국가의 입장에서는 그편이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피해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여전히 우리가 우리에게 가해를 한 상대에게 정신적으로 짓눌려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다시 말해 우리는 여전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피해자로서 억압과 착취의 구조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가리켜 ‘피해망상’이라고 한다.

2.

어떤 국가든 정치권력자들은, 국민 혹은 민족의 피해망상을 자극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보전한다. 우리의 역대 대통령들도 예외 없이 자신의 인기나 국정 장악력이 떨어질 때면 가장 상기하기 쉬운 민족적 상처를 끄집어내 감정적으로 자극하고 그 관련국에 강성발언을 하는 것으로 인기를 만회하고는 했다. 우리의 경우, 그 상대는 일본이나 북한이다. 일본이나 북한의 정치권력자들에게는 우리나라가 그런 상대국 중 하나일 것이다. 이런 수법은 미국 대통령이나 프랑스 대통령, 중국 주석, 영국 총리나 이란, 러시아의 정치지도자들도 다 똑같다. 강성발언을 쏟아내면서 우민정치를 하고 정치적 위기를 수습하는 것이다. 그래 히틀러가 했던 짓, 바로 그 짓이다. 그래서 나는 정치하는 인간들에겐 역사적 진실을 기대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들에겐 역사적 진실보다는 한줌의 권력을 보전하는 게 시급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3.

내가 믿는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나 일본의 기득권 정치세력은 한일 간 역사인식의 차이에서 노출된 문제들이 해결되길 절대로 바라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일 간 역사적 갈등은 역대 정권이 다음 정권에게 그대로 보전해서 내려주는 ‘전가의 보도’ 같은 것이다. 정권에 민심이 이반할 때 써먹으라고 전수해주는 것이다. 훈훈하면서 더러운 유습이라고 할 수 있겠지. 실제로 이승만부터 박근혜까지, 역대 모든 대통령은, 내치의 부진에 대한 국민의 원성을 일본에 대립각을 세우는 것으로 만회하고는 했다. 대표적인 게 이명박의 독도 상륙 아니던가. 이 정치권력의 위선에 놀아나는 건, 오랜 시간 동안 일관되게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세뇌와 세례를 받은 우리 국민뿐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온다.

4.

이처럼 전후 70년 동안 되풀이해온 구습을 다시 바라볼 것을 주문한 책 한 권이 어제 법원으로부터 판매금지 가처분 결정을 받았다. 박유하 著 <제국의 위안부>가 바로 그것이다. 21세기 개명한 세상에 금서禁書라니,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어이가 없고 치가 떨릴 뿐이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끔찍한 위선으로 이루어진 세상인지를 너무나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지인이 내게 이렇게 묻더라. 당신은 소설가인데 왜 그토록 제국의 위안부 논란에 관심이 많으냐고. 그래서 나는 대답했다. 이 문제는 내게는 위선과 양심의 싸움, 야만과 합리의 싸움처럼 보여서 그런 거라고. 그건 내 문학적 주제이기도 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