渦中日記 2015/1/31

하루 늦은 일기를 씁니다.어제 토론회개최를 직간접으로 도와 주시고, 응원해 주시고 함께 해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드립니다.

한국어판에 대해 이야기해주신 장정일 선생님의 토론문은 공개를 허락해 주셨으니 이 아래에 붙여 두겠습니다. 일본어 판에 대해 말해 주신 Veki Yoshikata 선생님도 괜찮으시면 자료 이하에 공개해주세요.1부에서 두분의 말씀을 듣고, 2부에서 제가 대답하고 참석해주신 또 다른 분들의 질문에 대답하는형식으로 진행했었습니다.내용이 정리되면 나중에 다시 공개하겠습니다.

이런저런 한계도 보였지만 아무런 연고없는 젊은 분들이 2차 모임까지 참여해서 열띤 토론을 벌였던 것이 가장 큰 수확의 하나가 아니었나 합니다.
참석해주셨던 분들,미처 말씀하지 못하셨던 이야기나 감상 올려주시면 다른 분들이 분위기를 더 잘 아실 수 있을 듯 합니다. 저에겐 페북 커뮤니티의 가능성을 다시 한번 절감한 자리였습니다.
<법정에서 광장으로!>운동에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감사드리면서,1차 보고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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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위안부』: ‘원점’을 직시하기, 혹은 ‘복잡성’을 마주하고서(장정일)

이 자리에서 발제를 하게 된 저는『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리,2013)에 대해 결코 중립적으로 말할 수 있는 발제자가 아닙니다. 저는 이미 박유하씨가 낸 두 권의 책에 무척 호의적인 리뷰를 쓴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 리뷰는 지은이의 와세다 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인『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문학동네,2011)를 읽고서입니다. 그 책은 일본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것으로, 소세키는 타계한 바로 그 해(1916)부터 지금까지 부동의 일본 ‘국민작가’자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국민작가’는 스스로의 예술혼이나 작품의 힘만으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예컨대 1933년, 천황제와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다가 감옥에서 고문을 받고 죽었던 고바야시 다키지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그의 저항적인 문학과 실천 모두가 온전히 평가되지 않았던 반면, 천황제나 일본제국주의에 순응적이었던 소세키의 ‘자기 본위주의’는 마치 천황제와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기나 했던 양 예찬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이 보여주는 것은 명백합니다. 어느 나라에서 어느 작가가 국민작가가 되고 말고는, 그를 국민작가로 주조해야 할 필요가 있는 그 나라의 역사적 맥락 때문입니다. 이 말을 널리 알려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국민작가란 (전례에 따라) 의례히 그렇게 있어왔던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국민작가가 ‘만들어진 산물’이라는 결론은 ‘국민작가란 원래 없는 것’이라는 주장을 반복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들리지만, 국민 작가가 ‘만들어진 산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처음부터 ‘국민작가 따위는 없다’고 말하는 태도와는 매우 다릅니다.『제국의 위안부』를 이야기하면서 다시 나오겠지만,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상(像)은 만들어졌다!’라는 주장과, 일본 우익이 말하는 것처럼 ‘군 위안부 따위는 없었다!’라는 주장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만큼 서로 다른 주장입니다.
소세키가 ‘만들어진 국민작가’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지은이는 소세키의 작품 바깥으로 나가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라는 제목, 그리고 ‘나쓰메 소세키로 읽는 근대’라는 부제가 암시하고 있듯이, 소세키라는 국민작가가 만들어진 과정을 추적하기 위해서 지은이는 문학만 아니라 역사학․사상사․여성학 등을 폭넓게 연구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사정은 오늘의 인문학이 분과 학문이 아니라, 학제 연구라는 것을 새삼 확인해 줍니다. 분과 학문에서 학제 연구로의 이런 변화는, 이제 문학만 연구하는 문학 연구자, 역사만 연구하는 역사 연구자, 사상사만 연구하는 사상사 연구자, 여성학만 연구하는 여성학 연구자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저의 말을 여기까지만 듣고도, 제가 다음에 하고자 하는 주장을 미리 눈치 채신 분도 계실 겁니다.『제국의 위안부』에 반감을 가지신 분들 가운데는 ‘당신이 무슨 역사학자냐? 역사를 전공하지도 않은 비전문인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작금의 문학 연구는 문학 연구에 그치지 않으며, 다른 학문의 사정도 그러합니다.『제국의 위안부』가 지은이의 전공인 일본근대문학과 전혀 상관없지 않다는 것은 다무라 다이지로가 쓴 단편소설「메뚜기」(142~150쪽)에 대한 분석으로도 증명되지만, 그 대목이 없었다하더라도『제국의 위안부』는 오늘의 문학 연구가 ‘문서를 읽는 모든 일’로 확장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또한 이 책에는 박완서의 단편소설「그 여자네 집」, 이현세의 장편 만화『남벌』, 텔레비전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각시탈>, 애니메이션 <소녀 이야기>에 대한 짤막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 뜻에서 저는『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와『제국의 위안부』사이의 거리는 그리 크지 않으며, 두 책이 똑같이 만들어지는 ‘민족 정체성’과 ‘젠더 억압’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고 봅니다.
저는『제국의 위안부』가 나왔을 때 리뷰를 쓴 바 있습니다. 발제문을 쓰기 위해 그 리뷰를 다시 보니, 지면의 제약과 계몽적인 절차 때문에, 이 책이 가진 가장 뜨거운 쟁점(문제)을 지은이만큼 날카롭게 드러내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가 이 책에서 발견한, 아니, 저보다 먼저 그 뜨거운 쟁점을 발견해서 그것을 법정으로 가져간 사람들에 따르면, 이 책의 두 가지 문제(쟁점)가 있다고 합니다. ①위안부는 강제 연행을 당하지 않았다(이런 주장은 27, 33쪽부터 나오다가 “‘위안부’들을 ‘유괴’하고 ‘강제연행’한 것은 최소한 조선 땅에서는, 그리고 공적으로는 일본군이 아니었다.”라고 말하는 38쪽에서 명백해 진다. 그러나 방금 인용한 쪽에서도 “군인이나 헌병에 의해 끌려간 경우도 없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라고 썼듯이 ‘강제성이 없었다’는 지은이의 주장은 항상, ‘경찰이나 군인에 의한 강제 연행이 아주 없었다고는 말 할 수 없지만’이라는 유보 단서를 달고 있다. 42, 50, 51, 110, 111, 152, 291~292쪽이 대표적이다). ②위안부는 일본군과 동지적 의식을 나누었다(67쪽에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가 기본적으로는 동지적인 관계였기 때문이었다.”고 처음 나오며, 75, 162쪽 등에서 볼 수 있다).
문제가 되고 있는 두 대목은 ‘강제로 납치되어 위안소에서 풀려날 때까지 윤간을 당했다’는 생존 위안부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처럼 보이고, 나아가 ‘군위안부 따위는 없었다!’라고 말하는 일본의 극우의 주장을 닮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지은이는 ‘강제로 납치되어 위안소에서 풀려날 때까지 윤간을 당했다’는 생존 위안부의 증언을 부인하거나 거짓말이라고 반박한 경우가 없습니다. 지은이는 그것이 “평균적인 모습이 아니”(51쪽)라고 말할 뿐입니다.
일본 극우는 ‘강제연행은 없었다, 하므로 군위안부 따위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지만, 지은이는 이 책의 서두 여러 곳에서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타지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오랫동안 전쟁을 벌임으로써 [군위안부라는] 거대한 수요를 만들어냈다는 점만으로도 일본은 이 문제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첫 번째 주체이다. 더구나 규제를 했다고는 하지만 불법적인 모집이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집 자체를 중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일본군의 책임은 크다. 묵인은 곧 가담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25~26쪽), “조선인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가 된 것이 ‘식민지’에 대한 일본 제국권력의 결과인 이상 일본에 그 고통의 책임이 잇는 것은 분명하다.”(49~50쪽), “그녀들을 만든 것이 식민지지배 구조라는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91쪽) 식민을 통해 조선을 근대화 시켰다는 일본 우익이 이런 주장을 하겠습니까? 극우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지은이의 주장 ①은 식민지 조선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원점(原點)’의 문제와 연관이 있습니다. 한일합방이 된 1910년 이후, 조선은 일본과 형식상 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1등 시민인 일본인과 2등 시민인 조선인의 차이는 오늘날 미국에서 흑인이 백인에게 당하는 차별보다 더 컸으면 컸지 작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일제는 전쟁 말기에 초등학교 선생이 군도를 차고 수업을 할 정도로 엄한 통치를 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어쨌든 조선은 행정제도와 치안․법이 지배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군위안부 대량 조달에는 잘 구비된 행정력이 동원되었을 것이고, 그것을 등에 업은 업자와 포주가 활동했습니다. 이때 취업 사기를 치러 온 업자에게 현지의 정보를 귀띔해주고 그들에게 공신력을 빌려준 장본인이 주민 사정에 밝은 면장이나 이장들입니다. 이런 조직을 유지하고, 그들을 하수인으로 부리지 않을 바에는 뭐하러 조선총독부를 세웠겠습니까? 일본은 중국과 남방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한 명의 군인도 아까운 지경입니다. 그런데 그 군인을 보내서 마치 ‘보쌈’하듯이 강제연행해본들 얼마나 하겠습니까?
가끔씩 한국 신문을 보면, 한국의 연구자나 외국의 연구자에 의해 ‘위안부 강제연행’의 증거라면서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발굴된 자료가 대서특필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자료들은 “‘위안부’의 ‘강제연행’은 전쟁터에서만 이루어졌던 것처럼 보인다.”(158쪽)라는 지은이의 주장을 더 잘 뒷받침해 줄 뿐, 조선의 일반적인 상황을 나타내 주지는 않습니다. 조선은 무법이 활개를 치는 전쟁터가 아니었던 데다가, 일본 내지는 물론 일본군을 위한 자원과 식량을 생산하는 중요한 병참입니다. 형식적으로 마나 내선일체를 흉내 내어야 할 일본이 군경을 동원하여(물론 그들만의 법이겠지요), 강제연행을 저지른다면 조선인의 대대적인 저항을 사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일제시대에 각계각층에서 활약한 일선동조론자들의 존재를 알고 있습니다. 어쩌자고 그들이 저런 만행을 눈뜨고 보면서도 일선동조를 주장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은이가 군위안부를 모집하는 데 일본 군경에 의한 강제연행보다 “마을 내부 사람”(39쪽), “동네 사람”(41쪽), “우리들 자신”(52)이 하수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런 근거에서입니다.
지은이의 주장 ①이 식민지 조선의 성격 혹은 일제의 조선 식민지 통치전략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원점’ 해석과 연관되어 있다면, ②는 우리를 일본군 위안부의 ‘복잡성’과 대면하게 합니다. ②의 주장은 이 책의 제목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데, 책 제목에 나오는 ‘제국의 위안부’는 누구를 주체로 하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이 제목은 자칫 위안부를 주체로 ‘위안부들 스스로가 자신을 제국의 위안부로 생각했다’로 해석되기 쉽지만(그렇게 해석되는 대목도 있다), 실제로는 일제가 주체입니다. (방점 필자) “국가가 일본인을 비롯한 ‘제국의 위안부’에게 맡긴 가장 중요한 역할은 […] 성적 착취를 당하면서도 죽음을 앞둔 군인을 ‘후방의 인간’을 대표하여 ‘전방’에서 ‘위안’까지도 요구되고 있었다. 그녀들이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고 무슨 날이면 ‘국방부인회’의 옷을 갈아입고 기모노 위에 띠를 두르고 참여한 것은 그래서였다. 그것은 국가가 멋대로 부과한 역할이었지만, 그러한 정신적 ‘위안’자로서의 역할 – 자기 존재에 대한 (다소 무리한) 긍지가 그녀들이 처한 가혹한 생활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61쪽), “가족과 고향을 떠나 머나먼 전쟁터에서 내일이면 죽을지도 모르는 군인들을 정신적․신체적으로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역할. 그 기본적인 역할은 수없는 예외를 낳았지만, ‘일본 제국’의 일원으로서 요구된 ‘조선인 위안부’의 역할은 그런 것이었[다.]”(65쪽) 요즘 말로 하자면, 일본군은 군위안부에게 육체적 봉사에 그치지 않고, ‘감정노동(착취)’까지 요구했는데, 이 요구야말로 군은 물론 남성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지금껏 원해 왔던 게 아니었는지요? 그 결과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가 기본적으로는 동지적인 관계”였다는 분석도 나오게 된 바, 그것은 일본군과 남성 일반이 여성에게 강요하는 감정 노동의 압박을 도외시하고는 옳게 납득될 수 없으며, 그 처지에 놓인 군위안부 여성의 절박한 생존법을 헤아리지 않으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뜻에서 ‘제국의 위안부’의 주체는 절대 위안부(여성)로 오독될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 책에 나와 있는 군위안부들의 (윤색되지 않은)초기 증언, 즉 일본군 군위안부 문제를 처음으로 공론화한 센다 가코의『목소리 없는 여성 8만 명의 고발, 종군위안부』(1973), 한국정신대연구회․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증언집)』(한울,1993~1999), 미국 정부 전쟁정보국이 전시에 포로로 보호한 조선인 위안부들에 대한 보고서 등을 보면, 현재 우리들이 알고 있는 ‘강제로 납치되어 위안소에서 풀려날 때까지 윤간을 당한’, ‘나이 어린’ 일본군 위안부상과는 다른 위안부들의 증언을 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거짓말을 하거나 착각을 한 것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위안부상은 “하나의 이미지만으로는 결코 충분치 않는 다양한 측면”(19쪽)을 없애버리고 “아직 어린 10대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가 노예처럼 성을 유린당한 조선의 소녀”(17쪽)로만 고착되었을까요? 한일 사이의 풀리지 않는 과거사 청산 문제가 한국인의 ‘피해자성’을 부채질하고, 거기에 대한 반동이 일본 우익을 혐한으로 극우로 몰아가는 것일까요?
이 발제문을 쓰기 위해『제국의 위안부』를 재독하면서 저는 이 책의 꼬투리를 될 수 있는 한 많이 찾아보겠다는 결심을 했고, 실제로 많은 꼬투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앞서 잠시 나왔지만, 한국이 위안부의 피해자성을 너무 내세우는 바람에 선량한 일본인들까지 혐한과 우경화로 내몰았다는 주장(203, 314쪽), “‘위안부’가 강제로 끌려온 피해자였다면 일본 군인들 역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국가에 의해 머나먼 이국땅으로 ‘강제로 끌려온 존재’였다.”(74쪽)는 주장(이 주장에 대해서는 필자를 대신해서 약간의 변명 섞인 부연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위안부 문제에서 식민지의 구조적 강제성과 “가부장제의 강제성”(26쪽)을 동렬로 놓는 주장 등이 그렇습니다. 이 꼬투리들은 앞으로 좀 더 심화된 연구를 필요로 합니다. 마지막으로 조선인 군위안부 문제를 둘러 싼 한일간의 사죄와 보상 문제를 거론한 3부와 냉전 종식과 군위안부의 현재적 의미를 묻는 4부에 대해서는 요약과 발제를 생략했습니다. 먼저 저는 현실 정치가 관련된 2․3부는 한일 사이에 ‘하나’가 아닌 ‘여러’ 위안부상에 대한 일정한 합의가 있기 전에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속단이겠지만, 이번 세미나에서 위안부의 실체를 놓고 논의를 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라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54028347957412